파트리스 드 마크 마옹: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앱 iOS 앱 편집
잔글편집 요약 없음
태그: 시각 편집 m 모바일 웹
29번째 줄:
1873년 5월 왕당파의 추대로 [[아돌프 티에르|티에르]]에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행정면에 수완이 없어 그가 기대하던 왕정복고의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1875년]]의 헌법제정을 거쳐 7년제의 대통령 임기를 실현시킨 후에도 여전히 왕당파의 입장을 추진했으나, 공화파에 밀려 [[1879년]] 정계를 떠났다.
 
상원의원과== 상원의원직과 알제리 추가 복무 ==
프랑스 귀환 후 마크마옹은 많은 훈장을 받았고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다. 더 활동적인 삶을 바라며 그는 프랑스 본토의 군 고위직을 거절하고 알제리로 돌아가서 [[카빌리족 (베르베르족의 일파) 과 맞섰다. 프랑스에 있을 때 그는 상원의원으로서 펠리체 오르시니의 나폴레옹 3세 암살미수로 인해 발의된 안보 정책에 대한 위헌 법률에 반대했다.
 
마장타== 마젠타 : 프랑스 원수 ==
프랑스 귀환 후 마크마옹은 많은 훈장을 받았고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다. 더 활동적인 삶을 바라며 그는 프랑스 본토의 군 고위직을 거절하고 알제리로 돌아가서 카빌리족 (베르베르족의 일파) 과 맞섰다. 프랑스에 있을 때 그는 상원의원으로서 펠리체 오르시니의 나폴레옹 3세 암살미수로 인해 발의된 안보 정책에 대한 위헌 법률에 반대했다.
마크마옹은 1859년 이탈리아 전역으로 유명해졌다. 마젠타 전투에서 그는 자신의 부대를 윗선의 명령 없이 중요한 순간에 진격시켜 프랑스의 승리를 가져왔다. 그는 이 행위로 황제 나폴레옹 3세에 의해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고, 마장타마젠타 공작위를 받았다. (마장타는 프랑스어 발음. 마젠타는 이탈리아어 발음.)
 
 
 
마장타 : 프랑스 원수
 
마크마옹은 1859년 이탈리아 전역으로 유명해졌다. 마젠타 전투에서 그는 자신의 부대를 윗선의 명령 없이 중요한 순간에 진격시켜 프랑스의 승리를 가져왔다. 그는 이 행위로 황제 나폴레옹 3세에 의해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고, 마장타 공작위를 받았다. (마장타는 프랑스어 발음. 마젠타는 이탈리아어 발음.)
 
 
 
알제리 총독
 
== 알제리 총독 ==
1861년 마크마옹은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의 대관식에서 프랑스 대표로 참석했다. 1864년 그는 알제리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마크마옹은 이 임명으로 유명해지지는 않았다. 그가 몇 가지 개혁들을 단행하기 시작하자 수많은 불만들이 그에게로 향했다. 1870년 초, 그는 나폴레옹 3세에게 사표를 냈다. 훗날 안좋게 끝나버린 올리비에 내각이 만들진 후 황제는 그의 알제리 계획을 버리고 마크마옹을 다시 불러들였다.
 
== 전쟁과 파리 코뮌 ==
 
 
전쟁과 파리 코뮌
 
마크마옹은 보불전쟁에 참여했다. 알자스에서 그는 여러 차례 패배했고, 스당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전체적으로 그의 책략은 혼란스러웠고 우유부단으로 특정된다. 9월 1일 그는 스당 항복으로 포로가 되었다.
 
1871년 그는 프랑스 제 3 공화국의 명령으로 가혹하게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생포한 베르사유 정부군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1871년 1월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항복했고, 베르사유에 새 과도정부를 세웠다. 파리의 급진파들은 이 정부를 거절하고 파리 코뮌을 세웠다. 1871년 5월 마크마옹은 파리 코뮌에 맞서 베르사유 정부의 군대를 이끌었다. 나중에 La Semaine Sanglante (피로 물든 주) 라고 불린 격렬한 싸움 속에서, 마크마옹의 정부군은 코뮌을 박살내고 많은 코뮌 지지자들을 처형했다. 그는 이 일로 비난받지 않았고 오히려 우파에게 시대의 영웅으로 추켜세워졌다.
 
== 공화국의 대통령 ==
 
 
공화국의 대통령
 
인기에 힘입어 마크마옹은 1873년 5월 24일 아돌프 티에르의 뒤를 이어 왕당파 다수에 의해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총리 쥘 뒤포르를 경질시킨 후 그는 왕당파인 알베르 드 브로유 공작을 총리직에 임명해 왕정 복고를 계획했으나 복위 실패로 7년제 대통령제에 투표한다. 그 결정은 파리 주식시장 공채 가격을 뛰게 했다.
 
줄 68 ⟶ 55:
 
1879년 1월 5일 상원의원 선거로 인해 좌파에게 국회가 넘어갔으며, 더이상 어떠한 국회 지지자들도 빼앗기지 않으려던 마크마옹은 몇몇 장군들의 지휘권 박탈법령에 서명을 거부한 후인 1879년 1월 30일 사직하길 선택했다. 1877년 8월 15일날 레옹 강베타는 '대통령은 이 선택밖에 없다 : 굴복하거나 사임하거나.'라 표현했다. 공화파 쥘 그레비는 8시간 후 그의 직위를 승계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대통령
|전임자=[[아돌프 티에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