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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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로 이천석 관직을 역임한 유력 가문이었는데 [[어머니]]가 천했기에 [[요서군]]의 문하서좌(門下書佐)로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용모가 수려하고 [[목소리]]가 컸으며 말재주도 있는데 총명하기까지 하여 매양 수 개 조(曹)의 일을 한꺼번에 보고하면서도 잊거나 틀린 부분이 없었다.<ref>어환, 《전략》(典略) ; [[배송지]] 주석, 《삼국지》8권 위서 제8 공손찬에서 인용. [[이현 (당)|이현]]도 《후한서》73권 열전 제63 공손찬에 주석하며 인용</ref> [[태수]]가 기특하게 여겨 사위로 삼고는, 구씨산(緱氏山)에 있던 [[탁군]] [[사람]] [[노식]]에게 보내 경전을 배우도록 했다. 여기서 [[유비]]와 동문수학하며 깊이 교우하였다.<ref>《삼국지》32권 촉서 제2 선주 유비</ref> 이후 [[군 (행정 구역)|군]]의 상계리(上計吏)로 근무하였다.
 
장인의 후임 태수<ref>공손찬을 사위로 삼은 태수의 앞 [[글자]]는 《삼국지》의 판본에 따라 侯(후)와 故(고)가 있다. 태수의 성씨가 후씨일 수도 있고, 그저 옛 태수란 뜻일 수도 있다. 어쨌든 유기는 공손찬의 장인과는 다른 사람이다.</ref> 유기(劉基, 劉其)<ref>劉基는 《[[태평어람]]》 권422에 인용된 《[[영웅기]]》, 劉其는 《태평어람》 권526에 인용된 《영웅기》 </ref>가 [[죄]]를 지어 죄인용 수레[함거, 檻車]로 소환되었다. 공손찬은 스스로 그 시중들기를 원했는데 [[법률]]에서는 관리들이 가까이 따라붙는 것을 불허했으므로 외양을 꾸며 병사를 사칭해서는 [[수레]] 곁에서 모시며 [[낙양]]까지 따라갔다. 유기는 [[한나라]]의 최남단인 [[일남군]]으로의 유배형이 선고되었다. 공손찬은 [[돼지고기]]와 [[술]]을 들고 [[북망산]](北芒山)으로 가 조상들께 [[제사]] 지냈다. 술을 올리며 “예전엔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지금은 누군가의 신하인지라 응당 일남으로 가야 합니다. 일남의 습하고 더운 기운으로 인해 혹여 못 돌아올지도 몰라 이렇게 하직 인사드립니다.”라고 말하고 강개한 모습으로 재배하였다. 이에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다행히 가던 도중 유기가 [[사면]]받았다받아 공손찬의 일남군으로 가는 여행도 중단되었다.
 
=== 북방 이민족과의 혈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