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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10년(1921년) 1월 4일부터 [[유존사]]의 핵심 존재가 되어 국가개조운동에 관여하게 된다. 다이쇼 12년(1923년) 유존사가 해산당했다. 기타는 『[[일본개조법안대강]]』을 일부 복자로 발간하여, 의회를 통한 개조에 한계가 있으니 군사혁명, 즉 [[쿠데타]]에 의한 개조를 주장했다. 이것은 [[2·26 사건]]의 주모자인 청년장교 [[무라나카 타카지]], [[이소베 아사이치]], [[쿠리하라 야스히데]], [[나카하시 모토아키]]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동 문건에서 사유재산, 사유토지에 제한을 두어 자본의 집중을 방지하고, [[화족]] 같은 특권계급이 천황과 국민을 가로막는 울타리라고 지적, 그 철거를 주장했다.
 
다이쇼 15년(1926년), [[야스다 공제생명회사 내분사건]]이 일어났다. 기타의 앞잡이였던 시미즈 코노스케가 피로 물든 옷을 입고 야스다 생명에 나타나 회사를 위협했다. 같은 해 기타는 15은행이 재산을 사리사욕에 남용, 경영이 난맥을 당하고 있다고 공격하는 [[찌라시]]를 제작해 각 방면에 뿌렸다. 기타의 영향하에 있는 군인, 우익의 테러를 우려한 [[자이바쓰|재벌]]들은 기타에게 정보료 명목으로 뇌물을 보냈다. 이 자금으로 기타는 “당당한 저택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보내고, 처자 3인 외에 하녀 3명, 자동차 운전수 1명 등을 먹여살렸다. 즉슨 기타의 생계수단은 재계를 대상으로 한 [[공갈]]이었다. 같은 해 [[궁내성 괴문서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이듬해인 쇼와 2년(1927년) 석방되었다.
 
쇼와 11년(1936년) [[2·26 사건]]으로 체포. 쇼와 12년(1937년) 8월 14일, 민간인임에도 불구하고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는다. 5일 후인 8월 19일, [[니시다 미츠기]]와 함께 [[총살형]]에 처해졌다. [[사세구]]는 “[[쇼와 천황|도련님]]에게 [[일본군|투구]]를 빼앗겨 져 버린 싸움(若殿に兜取られて負け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