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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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hina-Shandong.png|300px|섬네일|right|[[산둥 성]]. [[의화단]] 활동 주요지였다.]]
 
의화단 운동의 발원지는 [[산둥 성]]과 [[즈리 성]]의 경계지로 이 지역으로부터 [[청일 전쟁]] 이후에 자발적으로 반기독교 움직임이 계속적으로 일어나 [[산둥 성]] 전체로 파급되고 있었다.<ref name="의화단 운동의 발전">《근대중국:개혁과 혁명-중화제국 마지막 왕조의 몰락(下)》,신승하 저. 대명출판사. p416~p418</ref> 따라서 10여년 전에 일어난 교안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미루어져 온 사건도 있었다. 예를 들면 [[1894년]]에 이병형(李秉衡)이 [[산둥 성]] 순무로 부암하였을 때 [[1886년]]에 일어난 선교사와 교민들의 횡포에 분노한 민중들이 [[교회]]당을 불태운 '연주교안'(州敎案)은 아직 해결되지 못한 상태<ref>《[http://book.naver.com/bookdb/text_view.nhn?bid=253476&dencrt=ukTCfD5ZBb3n%253%395x%252BwbrLby76idOcvWrP67TQaBTCRA8%253D&term=%BF%AC%C1%D6+%B1%B3%BE%C8&query=%EC%97%B0%EC%A3%BC%EA%B5%90%EC%95%88 의화단운동 전후의 산동]》</ref> 였는데,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돌려받고 [[독일제국|독일]]인의 입김이 커지면서 교안도 피동적으로 해결되었다.<ref name="의화단 운동의 발전"/>
 
뒤이어 조현(曹縣)에서 유사단(劉士端)이 보위신가(保衛身家)를 내세워 [[1894년]]에 대도회(大刀會)를 조직하고, [[1896년]]에 [[반기독교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청 조정에서는 양강총동 [[유곤일]](劉坤一)과 [[산둥 성]] 순무 이병형을 파견하여 이들을 평정하였다. 그러나 산발적인 반기독교 운동은 그대로 지속되었다.<ref name="의화단 운동의 발전"/> [[1897년]] 11월에 조주부(曹州府) 거야현(鉅野縣)에서 독일 선교사 2명이 살해되는 '거야교안'(鉅野敎案)이 일어났다. 즉, 거야현에서 [[조언학]](曹言學)의 대도회 무리들이 큰비를 무릅쓰고 현(縣)<ref>마을</ref> 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마반장(磨盤張)<ref>장가장(張家莊)</ref> 의 독일 [[천주교]] 성당으로 들어가 선교사를 살해하였다. 이후 제녕(濟寧), 수장(壽張), 성무(成武), 단현(單縣) 등지에서도 대도회와 민중이 여기에 호응하여 반기독교의 공기가 흉흉하였다. [[독일제국|독일]]은 이를 기회로 [[산둥 성]] 교주만(膠州灣)을 그들의 세력 범위로 삼았고 독일 공사 헤이킹(Herr von Heyking)은 [[산둥 성]] 순무 이병형을 파직, '영구히 임용하지 못하도록' 요구하였으나 청조는 그를 [[쓰촨 성]] 총독으로 이동시켰다.<ref name="의화단 운동의 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