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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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
[[파일:Okazakijo2.JPG|200픽셀|섬네일|왼쪽|[[오카자키 성]]]]
이에야스는 1543년 1월 31일 ([[와레키]]({{lang|ja|和暦}}) [[덴분]] 11년 12월 26일) [[미카와 국]] [[오카자키 성]]에서 태어났다.<ref>[{{웹 인용 |url=http://fubensai.hp.infoseek.co.jp/TokugawaIeyasu.htm# |제목=도쿠가와 이에야스] |확인날짜=2010-05-29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90914154925/http://fubensai.hp.infoseek.co.jp/TokugawaIeyasu.htm# |보존날짜=2009-09-14 |깨진링크=예 }}</ref><ref name="고미226">고미, 226쪽</ref><ref name="이길진25">이길진, 25쪽</ref> 아명은 마쓰다이라 다케치요({{lang|ja|松平竹千代}})로, 아버지는 [[마쓰다이라 히로타다]]({{lang|ja|松平広忠}})이며 어머니는 [[가리야 성]]의 성주인 [[미즈노 다다마사]](水野忠政)의 딸 [[오다이노가타]]({{lang|ja|於大の方}})이다.<ref name="고미226"/><ref name="이길진25"/> 이에야스가 태어났을 때에는 각각 열일곱 살과 열다섯 살의 젊은 나이였다.<ref name="요시다24">요시다 외, 24쪽</ref> 당시 미카와 마쓰다이라 씨는 히로타다의 아버지 [[마쓰다이라 기요야스]]({{lang|ja|松平清康}})가 살해당한 [[모리야마의 변]] 사건이 발생한 후 세력이 크게 쇠퇴하여<ref name="고미226"/><ref name="요시다24"/> [[스루가 국]]의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 원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마쓰다이라 씨가 지배하던 미카와 국 동부는 이마가와 씨가 지배하고 있었고<ref name="요시다24"/>, 서부는 [[오와리 국]]의 [[오다 노부히데]]가 계속 노리던 상황이었다.<ref name="고미226"/><ref name="요시다24"/>
 
이에야스는 태어난 지 2년 만에 어머니와 헤어졌다. [[1544년]] 외조부 미즈노 다다마사가 죽고 뒤를 이은 외삼촌 [[미즈노 노부모토]](水野信元)가 친(親)오다 정책을 유지하면서<ref name="이길진25"/><ref name="요시다26">요시다 외, 26쪽</ref> 가신의 탄핵으로 히로타다가 오다이를 친정으로 돌려보낸 것이다.<ref name="이길진25"/><ref name="요시다26"/> 1548년에는 히로타다의 숙부인 [[마쓰다이라 노부타카 (센고쿠 시대)|마쓰다이라 노부타카]]가 오다 씨와 내통하던 [[사카이 다다히사]] 등 중신들과 손잡고 히로타다를 오카자키 성에서 몰아내려는 모반을 일으켰고<ref name="이길진25"/><ref name="이길진26">이길진, 26쪽</ref> 오다는 미카와 국을 더욱 빈번하게 침략하기 시작하였다.<ref name="요시다28">요시다 외, 28쪽</ref> 히로타다는 이마가와에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고<ref name="이길진26"/><ref name="요시다28"/> 당주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당시 여섯 살이던 이에야스를 [[시즈오카 시|슨푸]](駿府)에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는데 히로타다는 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용하였다.<ref name="이길진26"/><ref name="요시다28"/> 그러자 이 소식을 접한 [[오다 노부히데]]는 [[아쓰미 반도]]에 위치한 [[다하라 성 (미카와 국)|다하라 성]]주이자 이에야스의 의붓 외조부<ref group="주">히로타다는 정실 부인인 오다이 외에 도다 가문 출신의 마키(牧)라는 후실을 두고 있었다.</ref> 인 [[도다 야스미쓰]]({{lang|ja|戸田康光}})를 이용하여 [[오와리 국]] 아쓰타(熱田)로 납치하였으며<ref name="고미226"/>, 그 대가로 1,000간몬<ref group="주">간몬(貫文, 관문)은 원래 중국에서 사용하던 동전의 단위로, 에도 막부 이후 금화, 은화, 동전이 사용되면서 동전을 세는 단위로 통용되게 되었다. 동전 1개를 1문({{llang|ja|匁|몬메}})이라고 하였으며, 1000문을 1간몬이라고 하였다. 1간몬은 쌀 한 섬에 해당하는 가치였다. 한편 이에야스를 납치하는 대가로 도다가 받은 돈은 5백 간몬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길진, 27쪽)</ref> 을 주었다.<ref name="이길진26"/><ref name="요시다29">요시다 외, 29쪽</ref><ref name="이길진27">이길진, 27쪽</ref> 노부히데는 이에야스를 인질로 삼아 히로타다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히로타다는 강경하게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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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해 보이겠다. ({{llang|ja|鳴かずともなかして見せふ杜鵑}}, [[도요토미 히데요시]])
*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 ({{llang|ja|鳴かぬなら鳴まで待よ郭公}},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쓰우라 세이잔]]의 수필 [[갑자야화]]에 수록된 [[센류]]<ref>[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07102902012251673001 임운규 칼럼 -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디지털 타임스]], 2007년 10월 29일</ref><ref>[http://smcb.jp/sosaku/3566 {{lang|ja|鳴かぬなら・・・ホトトギス}}]{{깨진 링크|url=http://smcb.jp/sosaku/3566 }} 슈미토쿠라부, 2009년 8월 5일</ref>}}
[[파일:NikkoHoto5147.jpg|200픽셀|섬네일|오른쪽|이에야스의 유골이 보존되어 있는 [[닛코 동조궁]]의 청동탑]]
[[파일:Mon-Tokugawa.png|섬네일|도쿠가와 가문의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