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석 (1909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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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출신이다. [[1933년]]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관리로 근무하다가, [[1934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했다. 1934년에는 조선총독부 체신국 전기과 서기로 근무했고, [[1936년]]에는 [[강원도]] 철원군 속(屬)으로 근무했다.
 
[[1937년]] 7월부터 [[함경남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경시, 경무과 경시, 순사교습소장으로 근무했고, [[1940년]] 2월에는 [[함경북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임명되었다. [[1940년]]함경남도 7월부터경찰부 [[조선총독부]]고등경찰과 기획부경시 사무관으로재직 근무했고시절에는 혜산 사건에 가담한 무장 독립 운동 조직인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의 국내 조직 검거 사건(혜산 사건, [[1942년]]惠山 11월부터는事件) 조선총독부피의자 식산국200여 사무관으로명을 근무했다검거, 취조했다. 또한 [[1943년중일 전쟁]] 9월에는후방 조선인으로서는교란을 올라가기방지한다는 어려운명분을 자리인내세워 국장으로함경남도 승진하여각지에 전주전매국장에방공단(防共團)을 조직하는 한편 함경남도 북청군, 홍원군, 문천군, 정평군, 영흥군에서 활동하던 농민 조합 운동, 노동 조합 운동에 가담한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 임명되었다취조했다.
 
[[1940년]] 7월부터 [[조선총독부]] 기획부 사무관으로 근무했고, [[1942년]] 11월부터는 조선총독부 식산국 사무관으로 근무했다. [[1943년]] 9월에는 조선인으로서는 올라가기 어려운 자리인 국장으로 승진하여 전주전매국장 겸 서기관에 임명되었다. [[1945년]] 4월부터는 식량 공출을 위한 기관인 [[조선식량영단]]의 황해도지부 감리관으로도 근무했으며, 1945년 5월에는 [[황해도]] 참여관 겸 농상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4월부터는 식량 공출을 위한 기관인 [[조선식량영단]]의 황해도지부 감리관으로도 근무했으며, 1945년 5월에는 [[황해도]] 참여관 겸 농상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광복 후에도 [[미군정]] 하 중앙경제위원회 사무장을 시작으로 중앙물가행정처 차관(1948년)에 임명되었고, [[대한민국 행정자치부|총무처]] 처장(1953년) 등으로 계속 등용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미군정]] 하 중앙경제위원회 사무장을 시작으로 중앙물가행정처 차관(1948년)에 임명되었고, [[대한민국 행정자치부|총무처]] 처장(1953년) 등으로 계속 등용되었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집권당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소속으로 [[경기도]] [[고양시|고양]]에서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목록|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장면]] 계열이었던 그는 이후 자유당을 탈당하여 [[민주당 (대한민국, 1955)|민주당]]의 신파에 합류했다가 제3대 국회의원 임기 중이던 [[1956년]] 사망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광복회]]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5년]] 서울대학교 교내 단체가 발표한 '서울대학교 출신 친일인물 1차 12인 명단'<ref>{{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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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51년]] [[5월 7일]] ~ [[1953년]] [[11월 1일]]
}}
 
{{전임후임 국회의원|
|전임자 = [[최국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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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지역구 의원 =
}}
 
{{토막글|한국 사람|정치인}}
 
[[분류:1909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