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경시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영어판 분류 정보를 이용.+분류:1세기 중국의 군주; 예쁘게 바꿈
편집 요약 없음
30번째 줄:
 
== 생애 ==
동생이 살해당하자 빈객과 함께 그 원수를 갚으려 했는데, 빈객이 법을 어기는 바람에 관리를 피해 평림(平林)에 숨었다. 관리가 아버지 유자장을 잡아가자, 죽은 척 하고 상여를 조상들의 봉국인 용릉으로 보냈다. 관리가 아버지를 풀어주자 달아나 숨었다.
[[22년]]에 녹림군의 농민반란이 발생한 후 진목(陳牧)이 이끄는 부대에 합류하였다.
 
[[22년]]에 [[녹림군]]의 농민반란이 발생했다. 원래의 녹림군과는 별도로 진목(陳牧)과 요담(廖湛)이 평림병(平林兵)을 일으켜 새로 녹림군에 가담하자, 이 평림병에 합류해 안집연(安集掾)을 맡았다.
[[23년]] 정월에 녹림군 등 연합군이 신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왕망]]을 살해한 후 경시장군(更始將軍)이 되었다.
 
[[23년]] 정월, 녹림군의 네 분파인 용릉병·하강병·신시병·평림병이 모두 합하여 신나라의 전수대부 진부와 전수속정 양구사를 살해한 후 경시장군(更始將軍)이 되었다.
같은 해 2월에 전한의 종실(宗室)이었기 때문에 추대되어 황제로 즉위하고, 한나라를 재건하고 연호를 경시(更始)로 개원하였다. 경시제가 재건한 한나라를 역사에선 현한이라고 부른다.
 
이 무렵 녹림군의 세력이 많아졌으나 장군들이 많아서 지휘가 중구난방이었기 때문에 제장들은 전한의 종실들 중에서 황제를 추대하기로 했다. 유현은 신시병과 평림병의 지지를 받았고, 그에 대항해 남양군의 사대부들과 하강병의 왕상은 용릉병의 지도자 유인을 지지했다. 내분을 꺼린 유인이 물러나 유현이 이해 2월에 황제로 즉위하고, 한나라를 재건하고 연호를 경시(更始)로 개원하였다. 경시제가 재건한 한나라를 역사에선 현한이라고 부른다. 족부 유량(劉良)은 국삼로(國三老)에, 녹림군의 두 창시자인 [[왕광 (경시)|왕광]]과 왕봉(王鳳)은 각각 정국상공(定國上公)과 성국상공(成國上公)에, 주유(朱鮪)는 대사마에, 황제 경쟁자였던 유인은 대사도에, 평림병의 지도자인 진목(陳牧)은 대사공에 임명하고, 나머지 녹림군의 지도자들은 구경과 장군으로 임명했다.<ref>예를 들면, 하강병의 지도자 왕상은 [[정위 (관직)|정위]]에 임명되었다.</ref> 5월에 유인이 완성을 함락해, 6월, 남양군 완성에 입성해 이곳을 수도로 삼고, 종실들과 장군들을 열후로 임명했다.
[[24년]]에 장안으로 천도하였다.
 
유인의 위명이 높아지자 이를 질시해 유인을 주살하고 광록훈 유사(劉賜)를 대신 대사도로 삼았다.
 
왕망이 태사 왕광(王匡)과 국장(國將) 애장(哀章)에게 낙양을 지키게 하자, 정국상공 왕광에게 낙양을 치게 하고 서병대장군(西屛大將軍) 신도건(申屠建)과 승상사직(丞相司直) 이송(李松)에게는 무관(武關)을 치게 했다. 이에 삼보가 모두 진동했고, 각지에서는 신나라의 주목과 태수들을 죽이고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으며 한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 9월, 장안에서 난리가 나 왕망이 살해됐다. 왕망을 죽인 공빈취(公賓就)가 그 머리와 인수를 완으로 보내니, 왕망의 머리를 완성 저자에 [[효시|효수]]했다. 이달에 낙양이 함락돼 신나라의 왕광과 애장을 사로잡아 보내니, 모두 참수했다. 10월에는 분위대장군(奮威大將軍) 유신(劉信)이 여남군에서 황제를 자칭한 유망(劉望)과 그의 대사마 [[장우 (신)|장우]]와 승상 진무를 죽였다. 낙양으로 천도했다.
 
[[24년]] 2월, 장안으로 천도하였다.
 
이송과 조맹이 공신들을 왕으로 봉할 것을 상주하자, 주유가 전한 고제의 명령대로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다고 반대했다. 경시제는 먼저 종실 중 태상장군(太常將軍) 유지(劉祉)를 정도왕(定陶王)에, 유사(劉賜)를 완왕(宛王)에, 유경(劉慶)을 연왕(燕王)에, 유흡(劉歙)을 원씨왕(元氏王)에, 대장군 유가(劉嘉)를 한중왕(漢中王)에, 유신(劉信)을 여음왕(汝陰王)에 봉했고, 나중에 이성제후왕을 세우니 왕광은 비양왕(比陽王)에, 왕봉은 의성왕(宜城王)에, 주유는 교동왕(膠東王)에, 위위대장군(衛尉大將軍) 장앙(張卬)은 회양왕(淮陽王)에, 정위대장군(廷尉大將軍) 왕상은 등왕(鄧王)에, 집금오대장군(執金吾大將軍) 요담은 양왕(穰王)에, 신도건(申屠建)은 평씨왕(平氏王)에, 상서 호은(胡殷)은 수왕(隨王)에, 주천대장군(桂天大將軍) 이통(李通)은 서평왕(西平王)에, 오위중랑장(五威中郞將) 이질(李軼)은 무음왕(舞陰王)에, 수형대장군(水衡大將軍) 성단(成丹)은 양읍왕(襄邑王)에, 대사공 진목은 음평왕(陰平王)에,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송조(宋佻)는 영음왕(潁陰王)에, 윤존(尹尊)은 언왕(郾王)에 봉했다. 주유만이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음은 감히 바꿀 수 없다 해 끝까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리고 주유는 좌대사마, 유사는 전대사마로 옮기고, 이송을 승상, 조맹을 우대사마로 옮겼다.
 
[[25년]] 봄, 정월에 방망(方望)과 안릉(安陵, 섬서성 咸陽縣의 동쪽) 사람 궁림(弓林)이 함께 전한의 황태자였던 정안공(定安公) [[유자 영|유영]]을 황제로 옹립하고 무리 수천 명을 모아 임경(臨涇, 감숙성 鎭元縣)에 머무르자, 승상 이송(李松) 등으로 하여금 이를 격파하고 정안공을 비롯하여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의 목을 베게 하였다.
줄 72 ⟶ 80:
|임기 = [[23년]] - [[25년]]}}
 
== 각주 ==
{{한나라의 황제}}
{{각주}}
 
== 출전 ==
범엽: 《후한서》 권11 유현유분자전 중 유현{{한나라의 황제}}
 
{{기본정렬:경시제,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