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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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金誠童, [[1452년]]<ref name=a>『국조방목』</ref> ~ [[1495년]] [[음력 10월 29일|10월 29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 생애 ==
사람됨이 침중(沈重)하고 간묵(簡默)해 빈붕(賓朋)과 노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으며, 항상 방에 거처하며 종일 남과 이야기하지 않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ref name=b>『용재총화』</ref>
[[음서 제도|음보]]로 관직에 올라 적성현감(積城縣監)를 지냈으며, [[1492년]](성종 23) 4월 식년문과에 갑과(甲科) 3등으로 급제했다.<ref name=a/><ref name=b/>
바로 당상관으로 승진했다가 11월 부평부사(富平府使)로 부임했는데, 직무를 잘 처리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려 칭송받았다. 부평부사로 취임한 지 2년이 되기도 전에 선정이 조정에 보고되어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加資)되고 중추부(中樞府)에 들어갔다.<ref name=b/><ref>『성종실록』</ref>
공무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있을까 골몰하면서도 집안일은 조금도 경영하지 않았으므로, 재상감이라는 평을 받았으나<ref name=b/>, [[1495년]](연산군 원년) 행호군(行護軍)으로 재직 중 졸했다.<ref>『연산군일기』</ref>
▲사후 [[증직|증]] [[사헌부]][[대사헌]](大司憲)에 [[추증]](追贈)되었다. 묘는 [[경기도]] [[시흥군]] 하상리(현 시흥시 하상동)에 안장되었고, 신도비와 재실이 있다.
== 가족 관계 ==
* 증조 - 김승(金陞) :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증(贈) 좌찬성(左贊成), [[김사형]](金士衡, [[1341년]] ~ [[1407년]])의 아들
** 조부 - 김종숙(金宗淑, ? ~ [[1470년]]) :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증 영의정(領議政)
*** 아버지 - [[김질]](金礩, [[1422년]] ~ [[1478년]]) : 좌의정(左議政),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문정공(文靖公)
*** 어머니 - 영의정,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충정공(忠貞公) [[정창손]](鄭昌孫, [[1402년]] ~ [[1487년]])의 장녀<ref>『정창손 신도비명』</ref>
**** 부인 - 좌찬성, 문량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 [[1424년]] ~ [[1483년]])의 차녀<ref>『강희맹 신도비명』</ref>
***** 아들 - 김려(金濾) : 충좌위부호군(忠佐衛副護軍), 증 병조참판(兵曹參判), [[김찬 (조선)|김찬]](金瓚, [[1543년]] ~ [[1599년]])의 조부
== 평가 ==
부평부사로 임명되어 직무를 잘 처리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려 칭송받았으며 박처륜(朴處綸)과 함께 성종대에 가장 유능하고 성실한 관리로 지칭되었다.
==
<references/>
{{토막글|한국 사람|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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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조선의 정치인]]
[[분류:조선의 학자]]
[[분류:음서]]
[[분류:과거 급제자]]
[[분류:병사한 사람]]
[[분류:안동 김씨 (구)]]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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