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광릉여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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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가 젊고 아들이 없자 왕이 되기를 바라 [[무당]] 이녀수(李女須)를 불러와 저주를 행하게 했고, 이녀수가 [[전한 무제|무제]]의 혼이 강림했다면서 유서가 장차 천자가 되리라고 해 후하게 사례하고 무산에 제사를 드렸다. 마침 소제가 죽었고, [[전한 폐제|창읍왕 유하]]가 황제가 되자 무당을 시켜 저주했다. 유하가 얼마 못 가 폐위되자 이녀수 등을 더욱 신임했다. 그러나 다음 황제가 여태자의 손자인 [[전한 선제|선제]]로 정해지자 선제를 세운 명분에 반발해 이녀수에게 계속 저주를 하게 했다. 또 초왕 [[유연수]]의 처남을 사위로 삼아 유연수에게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 주도록 지지를 받아냈다. 나중에 유연수가 이 일이 적발돼 자결하고 초나라가 폐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연루되었음이 밝혀졌으나, 불문에 붙여지고 황금 5천 근과 기물들을 받았다. 광릉여왕은 후한 선물을 받은 데다 선제가 맏아들 [[전한 원제|유석]]을 태자로 정하자 황제가 되기를 포기하고 저주를 그만두게 했다.<ref name="h63"/>
 
아들 남리후 유보<ref>전대소·왕선겸에 따르면, [[유창 (남리후)|남리후 유창]]의 오기이다. 자세한 사항은 [[유서 (광릉여왕)#가계|가계]] 문단을 참고하라.</ref>가 살인을 저지르고 작위를 뺏겨 광릉나라로 돌아왔는데, 광릉여왕의 희첩 좌수(左修)와 간통하자 기시했다. 광릉[[제후상|상]] 승지(勝之)<ref>'승지'는 이름으로, 성씨는 알 수 없다.</ref>가 광릉왕의 사피(射陂)<ref>사양현에 있는 사수(射水)의 제방.</ref>의 밭을 뺏어 빈민들에게 주기를 청해 승인을 받자, 광릉여왕은 중단한 저주를 계속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저주하고 있던 것이 발각돼, 조정에서 조사에 나서자 입을 막기 위해 무당과 궁인 20여 명을 죽였다. 공경들은 광릉여왕을 죽이기를 청했고, [[정위 (관직)|정위]]와 [[대홍려]]가 신문하러 광릉나라를 찾아왔다. 광릉여왕은 사죄하고 이들을 돌려보낸 후, 궁에서 [[유패|태자 패]]·딸 근자·호생 등과 밤새 술을 마시며 총애하는 팔자(八子)<ref>전한 [[후궁 (중국)|후궁]]의 직급.</ref> 곽소군(郭昭君)·가인자 조좌군(趙左君) 등에게 노래와 반주를 맡기고 슬픔에 찬 노래를 부르니 좌우의 사람들이 함께 울었다. 이후 아침이 돼 모임을 파하고 태자 패에게 자신을 장사지내지 못하게 당부한 뒤, 목을 매 자살했다. 곽소군과 조좌군도 자살했다. 선제는 은혜를 베풀어 유서의 아들들을 사면해 서인으로 만들고, 유서에게 '[[여 (시호)|여]]'라는 시호를 내렸다. 기원전 54년, 재위 64년 만에 죽었다. 광릉나라는 폐지돼 광릉군이 됐고, 7년 후에 태자 패를 왕으로 삼아 부활했다.<ref name="h63"/>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