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홍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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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홍양'''(桑弘羊, [[기원전 152년]] ~ [[기원전 80년]])은 [[전한]] 중기의 관료로, [[하남군]] [[뤄양 시|낙양현]](雒陽縣) 사람이다. [[전한 무제|무제]] 때 균수법(均輸法) · 평준법(平準法) · [[전매제]] 등을 실시하여 재정면에서 막대한 권력을 휘둘렀다.
 
== 생애 ==
상홍양은 본디 장사꾼의 자식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셈에 탁월하여 열세 살 때 조정의 부름을 받아 시중(侍中)이 되었다.
 
[[원수 (전한 무제)|원수]] 3년([[기원전 120년|기원전 120]]), [[소금]] · [[철]] · [[술]]의 전매를 실시하여 막대한 효과를 거두었다. 이때의 공으로 [[대사농|대농]]승(大農丞)에 임명되었고, 이후 균수법을 추진하였다.
 
[[원봉 (전한 무제)|원봉]] 원년([[기원전 110년|기원전 110]]) 상홍양은 치속도위(治粟都尉) 겸 영[[대사농|대농]](令大農)에 임명되었고, 지방에 염철관(鹽鐵官) · 균수관(均輸官)을 설치하여 그 정책을 구체화하는 한편 각지의 물류를 조정하여 재정 수입을 늘렸다. 이 공으로 [[이십등작|좌서장(左庶長)]]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상홍양의 정책에 반발하는 이들이 많았다. [[시원 (전한)|시원]] 6년([[기원전 81년|기원전 81]]), 전국의 지식인들이 수도로 와 상홍양의 정책을 비판하였다. [[사공 (관직)|어사대부]]였던 상홍양은 이에 반론을 펼쳤고, 그 결과 술의 전매는 폐지되었으나 이외의 정책은 유지되었다.
 
시원 7년([[기원전 80년|기원전 80]]), [[상관걸]]과 함께 연왕(燕王) [[유단 (연날왕)|유단연날왕]]을 제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주살되었다.
 
== 출전 ==
* [[사마천]], 《[[사기 (역사서)|사기]]》 권30 평준서(平準書)
* [[반고 (후한)|반고]], 《[[한서]]》 권24상 식화지(食貨志) · 권68 곽광김일제전(霍光金日磾傳)
 
== 관련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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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후임
|직책=[[전한]]의 [[대사농|대농령]] (대행)
|임기=[[기원전 110년]] ~ [[기원전 100년]]
|전임자=[[장성 (전한)|장성]]
|후임자=(대사농으로 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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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후임
|직책=[[전한]]의 [[대사농]]
|임기=[[기원전 100년]] ~ [[기원전 96년]]<ref>이 해에 상홍양은 수속도위(搜粟都尉)로 좌천되고 다른 사람이 대사농에 임명된 것이 확인되나, 이름은 알 수 없다.</ref>
|전임자=(대농령에서 유임)
|후임자=(사실상) [[양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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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후임
|직책=[[전한]]의 [[사공 (관직)|어사대부]]
|임기=[[기원전 87년]] [[음력 2월]] [[을묘 #을묘일|을묘일]] ~ [[기원전 80년]]
|전임자=[[상구성]]
|후임자=[[왕흔 (전한)|왕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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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각주}}
<references/>
 
{{전한의 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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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기원전 152년 태어남]]
[[분류:기원전 80년 죽음]]
[[분류:한나라의 정치인]]
[[분류:전한 사람]]
[[분류:뤄양시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