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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제2대 회장 안창호http://video.segye.com/newsView/20170201002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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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초 [[한국 통감부]]는 그에게 내각 조직 제의를 했으나 거절, 이어 다시 제의가 들어왔으나 다시 일축하였다. 그해 [[4월 7일]] [[고양군]] 행주에서 열차를 타고 출발, 국외 망명의 길을 떠났다. 장기간 망명을 예상하고 이 때 거국가(去國歌)라는 노래를 지어 남기고 떠나다. 이때부터 이갑 등과 위해위(威海衛), 북경, 청도 거쳐 상해, [[블라디보스톡]] 등지를 여행, 유랑을 다녔다. 이때 산동성 청도(靑島)에서 당시 망명중이며, 독립 운동을 계획하는 인사들과 합동하고 청도회담을 개최하였다. 그해 [[8월]] [[소련]]에서 [[한일 병탄]] 소식을 접하고 그해 말 귀국했다.
 
한편 [[1910년]] [[5월]] [[미국]]에서 공립협회를 비롯한 미국 본토와 하와이의 각 한인단체가 통합하여 [[대한인 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결성되고, 1911년 3월 최정익이윤병구가 제1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처음에는 북미 지방총회와 하와이 지방총회만 있었으나, 계속하여 시베리아 지방총회와 만주 지방총회도 설립되었다.
 
{{인용문2|거국가(去國歌)<br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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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대한인국민회|청년학우회|흥사단}}
 
한일 합병 이후인 [[1911년]] 안창호는 다시 [[한국]]을 떠나 북만주로 건너가 밀산현 (密山縣) 에 무관학교를 세울 계획을 수립했지만 비용 마련이 어려웠고 계획이 여의치 못하여 세계일주로 계획을 변경, [[러시아]], [[독일]], [[영국]] 등을 거쳐 시베리아와 유럽을 횡단하여 배편으로 [[대서양]]을 건너 미국 뉴욕항에 도착하였다. 그해 다시 [[조선]]에 입국했으나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돌아와서 [[1919년]]까지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지냈다. [[1912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대한인 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의 중앙총회 조직에 참석하여, 중앙총회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그와 경합한 윤병구가 제2대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또한 민족운동의 구심점이 되는 단체 또는 측면지원단체 결성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민족성부흥운동을 위한 청년 엘리트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 [[한일 병탄]] 이후 해산된 [[흥사단]](興士團)의 부활을 추진하였다. 그해 《공립신보》를 《신한민보( 新韓民報)》로 제목을 바꾸어 간행하는데 동참하였다.
 
이후 안창호는 재기에 성공했다. 1914년 11월 대한인국민회 대표원회에서 제3대 중앙총회장에 당선된 것이다. 1915년 6월 23일 중앙총회 회장 취임식에서 안창호는 동포사회의 단결을 강조했다.
 
==== 흥사단 창설과 독립운동 준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