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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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세계대전전역}}
 
'''중일 전쟁중일전쟁'''(中日戰爭)은 [[1937년]] [[7월 7일|7월7일]] [[일본]]의 [[중국 대륙|중국대륙]]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끝날때까지 계속된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일본제국]] 사이의 대규모 [[전쟁]]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중국 항일 전쟁중국항일전쟁'''({{zh-stp|s=中国抗日战争|t=中國抗日戰爭|p=Zhōngguó Kàngrì Zhànzhēng}}), [[일본]]에서는 '''일중 전쟁일중전쟁'''({{llang|ja|日中戦争}})혹은, 또는 '''지나 사변지나사변''', 서구권에서는 '''제2차 중일 전쟁'''({{lang|en|Second Sino-Japanese War}})<ref>제1차 중일 전쟁은 [[청일 전쟁]]을 말한다.</ref> 이라고 부른다. 중일 전쟁은중일전쟁은 20세기 아시아 최대 규모의아시아최대규모의 전쟁이었다.<ref>Bix, Herbert P. 〈The Showa Emperor's 'Monologue' and the Problem of War Responsibility〉, 《Journal of Japanese Studies》, Vol.18, No.2. (1992 여름), 295~363쪽.</ref>
 
[[1931년]]뒤로 이후로 두 나라 사이에두나라사이에 간헐적으로 교전이 있었으나, 전면전은 [[1937년]] 이후로뒤로 시작되었으며, 일본의 연합국에 대한 항복과 함께 [[1945년]] [[9월 2일|9월2일]] 종료되었다. 전쟁은 수십 년간수십해동안 계속되어 온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의 결과였으며, 원료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을 정치·군사적으로 지배하려는 속셈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민족주의]]와 민족자결주의는 전쟁을 중국의 승리로 이끌었다. 1937년 이전에는1937년이전에는 양쪽이 다양한 이유로 소규모, 국지적 전투를 벌였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만주 사변]]을 일으켰고, 그 연장에서 일어난 [[1937년]]의 [[루거우차오 사건노구교사건|로구교사건]]({{zh|c=盧溝橋事件|h=노구교 사건}})으로 두 나라 간의두나라사이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의 기간에는 중국이 단독으로 일본에 맞섰으며, [[진주만 공격진주만공격]]뒤로 중일전쟁은 중일 전쟁은 더 큰 규모의더큰규모의 [[제2차 세계 대전제2차세계대전]]에 포함되었다. 이후 일본군의 전력은 급속히 쇠퇴했고, [[1944년]] 즈음에 일본은 이른바 '대륙타통작전'을 개시하면서 반격을 꾀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1945년]] [[8월 15일|8월15일]], [[일본 천황|천황]] [[쇼와 천황|히로히토]]가 [[연합국|연합군]]에게 발표한 무조건 항복 선언과무조건항복선언과 같은 해 [[9월 2일]] 연합국에 대한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식을항복문서조인식을 끝으로 중일전쟁 역시중일전쟁역시 종결되었다. 사상자는 2000만명이 넘었다.
 
==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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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다이쇼 시대|쇼와 시대|만주사변}}
 
1914년 유럽 및 중동에서 [[제1차 세계 대전제1차세계대전]](~1918년)이 발발하자 [[일본 제국]]은 [[영일 동맹]]을 이유로 [[연합국 (제1차 세계 대전)|연합국]]에 가담하여 참전했다.<ref name="글로벌 제1차 세계대전 일본"/> 그 진의는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를 더 높이고 국제적인 발언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ref name="글로벌 제1차 세계대전 일본"/><ref name="연민수"/> {{Rp|246}}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독일령이었던 중국 산둥 반도의 교주만과 독일령 [[남양군도]]를 점령하였다.<ref name="글로벌 제1차 세계대전 일본"/><ref name="연민수"/> {{Rp|246}} 산둥 반도를 점령한 일본은 [[1915년]] [[1월]] 중국에 대해 만주와 산둥 반도 등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반영구화하고 [[남만주]]와 [[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21개의 특혜조건을 요구하였고, 중국의 [[위안스카이]] 정부는 같은 해 5월 이를 수용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5·4 운동|5·4운동]](1919년)과 같은 격렬한 배일(排日) 여론에 밀려 실패하였다.<ref name="연민수"/> {{Rp|246~247}} 이 21개조에 대한 처리는 중국의 민중이 위안스카이에게서 이탈하는 계기가 된다. (→[[21개조 요구]]) 일본이 이와 같이 아시아의 독보적 강대국으로 인식되면서 급부상하게 되는데, 이 무렵, 일본 제국에서는일본제국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다이쇼데모크라시]] 시대로 경제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920년대 말에 [[경제 대공황경제대공황]]을 맞게 되면서 경제적 불황으로 인해 극우 군부 세력들이 암살 및 쿠테타를 일으키게 되었고, 일본의 민간 의회 정부는 전복되었다. 이어 일본은 경제 대공황을경제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식민지를 더욱 확보하고자 침략 전쟁의 길을 걷게 된다. 자원이 풍부한 만주 지역을 얻으려 전쟁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만주군벌만주군벌이였던 [[장쭤린장작림]] 폭사 사건폭사사건 등을 조작하였고지어냈고, 만주 침략에만주침략에 반대하였던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을 암살한 데 이어 [[1931년]] 선전 포고도선전포고도 없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만주사변으로 만주 지역의만주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한 일본 제국은일본제국은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부를꼭두각시정부를 세웠다. 이어, 경제 대공황을경제대공황을 극복하고자 '일-만 블록경제일만블록경제'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한편, [[국제연맹]]은 '만주를 불법 침략불법침략, 점령한 일본 제국의일본제국의 만주지역 철수'를 결의하자, 일본은 [[1933년]] 3월, 국제 연맹에서국제연맹에서 탈퇴하였다. 국제 연맹이국제연맹이 일본군의 만주 지역 철수를만주지역철수를 결의한 이유는까닭은, [[1차 세계대전1차세계대전]]의 연장인 [[터키 독립 전쟁터키독립전쟁]](1919~1921)에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터키 시민군에게터키시민군에게 패함으로써 [[로잔 조약로잔조약]](1923년)에서 식민지 일부를 포기해야 했기식민지몇몇을 때문이었다포기해야했기때문이었다. 서방 국가들은서방국가들은 일본이 식민지식민지확장에 확장에 나서는 것은나서는것은 일본의 강대국 부상의강대국부상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라는 새로운 경쟁자가 나오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식민지를 포기하게 되었을때 일본에게도 똑같이 식민지 포기를식민지포기를 요구한 것이었다.
 
=== 중국의 상황 ===
{{참고|신해혁명|북양 군벌|제1차 국공합작}}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중국 대륙은 격동의 시대였다. 중국의 사회질서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한편으로, 각지에서는 혼란을 틈타 여러 [[군벌]]세력들이 발호하였고 이러한 군벌세력들은 주민에 대한 온갖 갖은 수탈과 함께 열강세력에 빌붙는 등 매국행위를 마다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산둥]] 지방 내 독일 제국의독일제국의 이권을 일본 제국에일본제국에 양도한다."는 파리 강화 회의의빠리강화회의의 내용이 알려지자, [[1919년]] 5월 [[베이징]] 지역의북경지역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반군벌', '반제국주의' 운동이 일어났다.([[5.4 운동|5.4운동]])
 
1919년 [[5.4 운동]] 이후 중국에서는 민족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광둥]] 지방에서는광동지방에서는 [[중국 국민당|국민당]](1919년 10월 10일1919년10월10일)과 [[중국 공산당|공산당]](1920년 8월1920년8월)이 창당되고 [[1924년]]부터 여러 지역에 널리 퍼진 군벌을 타도하기 위해 '국민 혁명국민혁명', '[[제1차 국공 합작제1차국공합작]]'(~1927년)이 전개되었다.
 
국민당의 당수 [[쑨원]]이 사망(1925년)한 이후, 국민당 당수가국민당당수가 된 [[장제스]]는 쑨원의 정신을 이어받아 북벌운동을 전개하여 강력히 추진하였다. 장제스는 북벌운동으로 북양군벌세력들을 몰아내고 사실상 중국을 장악하게 되었고, [[1927년]]부터는 공산당 토벌에 나섰다.(제1차 [[국공내전]] 1927~36년) 그러나 [[1931년]] 만주 사변을 시작으로 [[일본 제국일본제국]]의 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중국 공산당중국공산당]]을 토벌하는 데토벌하는데 차질이 생긴 장제스는 군벌장개석은 세력들과군벌세력들과 연합하게 된다.
 
==== 만주사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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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ukden 1931 japan shenyang.jpg|섬네일|right|200픽셀|1931년. 일본군의 센양 점령.]]
 
중국에 대한 [[일본 제국일본제국]]의 21개조 요구안에21개조요구안에 대해 중국은 그 조약의 폐기 또는 무효를 주장하고, 국권 회복 운동을 펼쳐 나갔다. 특히 만주에서는 일본 제국의 후원을 받았던 봉천파 친일 군벌 [[장쭤린]]이 [[1928년]] 일본군에 의해 열차안에서 폭사당한 후, 아들 [[장쉐량]]은 반일 운동측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장쉐량은 국민당의 [[장제스]]과 손을 잡았는데, 당시 일본 제국은 대륙에서 완전한 식민지를 얻는 한편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하는 근거지로 삼기 위해 만주 지배를 획책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봉천 교외 유조구에서 남만주 철도를 폭파해놓고, 이것을 '중국군의 행동'이라 몰아붙여 이를 구실삼아 만주를 침략한다. 그 다음날 일본군은 [[펑톈]], [[장춘]], [[잉커우]]를 점령한 데 이어 21일에는 [[지린]]까지 진격했다. 이때 일본군의 병력은 1만 4천 명에 불과했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도 [[압록강]]을 넘어 북진했다.
 
한편, 이무렵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는 제3차 공산군 토벌작전에 나선 상태여서 군대를 북상시킬 수 없었으므로 일본과 전쟁을 회피하고자 했다. 당시 [[베이징]]에서 신병치료를 하고 있던 [[장쉐량]]은 장제스의 밀령에 따라 전보로 전군에 무저항 철수를 명령했다.(이때 장쉐량 휘하의 중국군 병력은 약 22만 명이었다.) 일본군은 [[1932년]] 2월 만주 전역을 거의 점령했다. 일본의 만주침략에 중국은 즉각 무력으로 대응하기보다는 '부저항'정책을 택하면서 외교적인 수단으로 만주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장제스는 [[국제연맹]]이 일본을 제재해주기를 희망하여 만주 문제를 국제연맹에 제소했다. [[9월 30일]] [[터키]]에서 철수한 국제연맹은 일본군의 철수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일본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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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일본 제국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수반으로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이로써 만주는 일본 제국의 자원 공급지이자 경제시장, 군사 기지 역할 등을 하게 되었고, 일본인들은 만주를 발판으로 적극적으로 중국대륙을 넘보기 시작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107607 "만주사변"]</ref>
 
이후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는 소규모 전투가 몇 차례 있었으나, [[1933년]] [[5월 25일]] 난징난징국민정부가 국민정부가 일본 제국에일본제국에 정전을 요청했고, [[5월 31일]] [[톈진]]의 외항인 탕구(塘沽, 당고)에서 중국이 크게 양보한 내용으로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이 정전협정에는 일본군이 [[만주국]] 안으로 철수하고 만리장성 이남에 비무장지대를 둔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이는 곧 만주국이 중국에서 분리되는 것을 난징 국민정부가남경국민정부가 인정한 셈이었다. 그러나, 광대한 [[만주]] 땅의 구석구석에까지 일본의 지배력이 미칠 수는미칠수는 없었으므로 만주에서는 [[동북항일연군]]을 비롯한 여러 갈래의 항일 무장활동이항일무장활동이 계속됐다.
 
==== 국공 내전국공내전 ====
{{본문|국공내전#반공산당 토벌전}}
[[1924년]], 군벌과 열강세력들을 몰아내자는 목표로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제1차 국공합작을 함으로써 북벌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27년]] 4월부터 국민당 [[장제스]]가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면서 국공합작이 깨지고 국민당은 대대적인 공산당 토벌전을 펼쳤다.
 
===== 중국 공산당 장정중국공산당장정 =====
{{본문|장정}}
[[파일:Map of the Long March 1934-1935-en.svg|썸네일|280px|right|중국 공산당 홍군의 장정 경로.]]
 
[[1931년]] 난창 지역에 중국중국공산당임시정부가 공산당 임시정부가 수립된 직후부터수립직후부터 공산당의 세력이 넓혀지는 것을 우려한 국민당은 무려 5번이나 공산당 지구를공산당지구를 포위하고 토벌전을 펴나갔다. 제1회 토벌은 [[1930년]], 2회와 3회는 [[1931년]], 4회는 [[1932년]] 6월에 이루어졌으나 모두 국민당의 참패로 끝났다. 그러던 중 [[1933년]] 10월에 100여만 명의 국민당 군대가 제5회 토벌을 시작했다. '공산당 토벌'을 4차례 실패를 겪은 [[장제스]]는 '군사 3할, 정치 7할'이라는 방침을 정했다. 이에 따라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는 농민을 [[홍군]]으로부터 떼어놓으면서 철저한 경제적 봉쇄작전을 폈고, 수천 개의 [[토치카]]를 만들어 공산당의 근거지인 [[난창]]을 압박했다.
 
이에 맞서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이 파견한 군사고문 리트로프(오토 브라운, 중국명 李德)의 지도 아래 정규군에 의한 정면대결 전술을 택했으나, 그 결과는 대실패였다. [[홍군]]의 거점은 차례로 격파됐고, [[1934년]] 3월 중국 공산당의 영역인 [[광창]](廣昌)이 함락되었다. 광창이 함락됨으로써 공산당세력은 거의 회복불능 상태에 빠졌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강서 소비에트'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7월에 '북상항일선언'을 발표했다. 이어 [[1934년]] 10월에 홍군의 주력인 제1방면군(규모 10만 명)이 이른바 '[[대장정]]'에 나서면서 강서성의 근거지를 버리고 서쪽으로 탈주했다. 오랜 기간동안 국민당 군대의 공격을 피하면서 무려 9,600km라는 장정 끝에 [[1935년]] 10월에 섬서성 [[옌안]]에 다다랐을 때, 살아남은 공산군은 약 2만 명뿐이었다.
 
==== 시안 사건서안사건 ====
{{본문|시안 사건}}
 
만주의 근거지를 잃은 동북군의 실력자 [[장쉐량]]은 [[1936년]] 1월 말 자신이 경영하는 동북대(東北大) 학생들이 [[시안]]에 찾아와 보고하는 내용을 들은 뒤로 항일여론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태도를 보였다. 동북군 안에서도 '반공보다는 항일'을 주장하는 여론이 거세졌다. [[1936년]] 11월 [[관동군]]이 [[내몽골]]을 독립시키기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수원사건]]으로 알려진 몽골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장쉐량]]은 수원성을 지키던 중국군을 돕기 위해 자신의 부대를 이동시키는 것을 허가해줄 것을 [[장제스]]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이를 불허하고 오히려 '공산군 토벌'을 요구했다.
 
장제스는 [[섬서 성]] 북부 지역에 근거지를 마련한 중국 공산당에중국공산당에 대한 총공격에 나설 준비를 갖춘 뒤 [[12월 4일]] [[시안]]에 도착했다. 시안에 도착한 장제스는 동북군의 장쉐량과 서북군의 [[양호성]]에게 '공산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따르던가 아니면 동북군과 서북군을 각각 [[푸젠 성]]과 [[안후이 성]]으로 이동시키던가 [[양자택일]]을 하라고 압박했다. 장쉐량과 양호성으로서는 '일치항일' 여론이 동북군과 서북군 전체에 확산된 상황에서 공산당 토벌명령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뒤의 선택 역시 자신들이 거세된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에, 결국 두 사람은 일종의 [[쿠테타]]인 병간(兵諫, 무력으로 통치권자를 위협하고 간함)을 결의하고 제6차 공산군 소탕전 명령이 발동된 [[12월 12일]] 새벽에 장쉐량이 장제스를 그의 숙소인 '화청지'에서 체포, 감금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2월 13일]] 장쉐량은 '일체의 내전 정지', '민중애국운동 개방', '쑨원의 유촉 준수', '구국회의 소집' 등 8가지 요구사항을 전국에 통전했다. 이와 동시에 장쉐량은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있는 보안(保安)으로 [[비행기]]를 보내 공산당 측 대표를 초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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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는 [[웨이리황]](衛立煌)의 지휘 아래 중앙군과 산서군이 [[일본군]] 제5사단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전개했다. 이 전투는 [[화북]]에서 치러진 초기의 전투 가운데 가장 격렬한 것이었다. 이때 [[팔로군]]도 유격부대로 나서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비행장을 파괴함으로써 국공 양군의 협력이 이루어졌다. 이 전투로 일본군의 화북 지역 점령은 지지부진해졌고, 진격은 1개월 정도 지연됐다.
 
==== 상하이 전투상해전투 & 삼광 작전삼광작전 ====
{{본문|상하이 전투}}
[[파일:Japanese Special Naval Landing Forces in Battle of Shanghai 1937.jpg|섬네일|right|200픽셀|1937년 [[상하이 전투]] 에서 [[일본 제국 해군]] 육전대]]
[[파일:Japanese artillery soldiers with gas masks, Changsha, 1941.jpg|섬네일|200픽셀|1941년 [[창사]] 전투 에서 [[일본 제국 육군]]]]
 
전쟁 초기전쟁초기에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 수뇌부들은일본군수뇌부들은 '2~3개월 정도면 중국대륙두세달즈음이면 전역을중국대륙전역을 점령해 전쟁을 끝낼 수 있을끝낼수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8월에 [[상하이상해]]에 상륙해 공략을 시작했는데, 상하이에서의 중국군의 저항은 매우 격렬했다. 특히 '오송 상륙 전투'[https://namu.wiki/w/우쑹%20전투?from=오송%20전투]' 에서 일본군은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이는 1930년대 초 [[중독합작|중국 주재 독일 군사고문]]으로 파견된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팔켄하우젠]] 장군과 [[한스 폰 젝트]] 장군이 강력한 벙커밭을 조성하였고, [[장제스]]의 직속군대 역시 독일식 장비를 갖추고 독일 군사고문의 조언대로 훈련 받으면서 육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이러한 벙커밭을 뚫기 위해 돌진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ref>상하이 전투를 '우쑹 크리크 공방전' 이라고 한다. '우쑹 크리크'라는 수로를 놓고 2만명의 [[일본군]]이 돌격을 했는데 일본군 상부는 '화기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총검만 쓸 것'을 명령했다. 문제는 그 우쑹 크리크 지역에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을 제대로 경험해 본 중국주재 독일 군사고문관인 팔켄하우젠의 지시로 지어진 독일식 콘크리트 진지, 각종 유럽제 중화기, 빽빽한 [[지뢰]]밭이 촘촘히 배치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1시간 만에 1만명이 전사하고, 3주만에 전체 병력의 96%가 손실되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ref> 또한 독일식으로 훈련받은 장제스의 직속군대의 정예 제88사단은 일본군의 지원 병력이지원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일본군 상륙부대를 상하이에 묶어 놓고, 매우 격렬하게 저항했다. 일본군은 3개월 동안의 전투끝에 지원부대가 증강되면서 [[11월 5일]]에 이르러 겨우 상하이를 점령하였다.<ref>이 전투에서 [[국민혁명군|중국군]]측은 27만 명이 전사했다. 중국군은 좁은 곳에 너무 많은 병력을 밀집시키는 바람에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예를 들어 일본군의 함포 사격 1발에 200명이 전사하기도 했다.</ref> 상하이 전투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고 전쟁이 장기화되어가자, 일본군은 적개심에 불타 무고한 양민들을 잔인하게 죽이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일본군은 가는 곳마다 태우고, 빼앗고, 죽이는 이른바 '삼광작전'을 개시하면서 살육전이 일반화 되어 갔다. [[1937년]] 12월, 상하이 교두보를상해교두보를 벗어난 일본군은 [[중화민국]]수도, [[난징남경]]으로 향했다.
 
==== 난징 대학살남경대학살 ====
{{본문|난징 전투|난징 대학살}}
[[파일:Iwane Matsui rides into Nanjing.jpg|right|250px|섬네일|[[1937년]] [[12월 13일]], 난징 성에 입성하는 일본군]]
[[파일:Nanking bodies 1937.jpg|섬네일|230px|난징 외곽 양쯔강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 일본군]]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할 즈음, [[중국 국민당중국국민당]]은 수도 난징을 포기하고 [[충칭]]으로 임시 천도한다고임시천도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 측 사령관 [[탕성즈]](唐生智) 장군은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난징을 삼면에서 좁혀 들어오는 일본군의 포위 속에포위속에 국민당 주요관리와 부유층들은 재빨리 손을 써서 도시를 빠져나갔고, 중일전쟁 발발 이전에 약 110만 명에 육박했던 난징은 도시를 빠져 나가려는 시민들과 일본군을 피해 난징으로 들어오는 피난민 등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었다. 난징성을 포위한 일본군은 탕성즈에게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난징성을 지키고 있던 탕성즈 휘하의 중화민국 군인들은 투항을 거부했다. 난징에 남아 수성하고 있던 탕성즈의 군대들은 도시 밖 요충지를 포기하고 난징성 안에 머무르며 고립된 채 방어하겠다는 전략을 택했다.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성을남경성을 점령하고 성 안으로성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난징성을 방어하고 있던방어하고있던 탕셩즈 휘하의 군대는 약 15만 명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무너졌다. 이는 중국군의 흐트러진 군기와 지휘관들의 부재 및 무능함에서 비롯되었다. 중국군은 제대로 전투도 못해 본 채 혼란 속에서 성을 빠져나가기에 급급했다.
 
난징성이 함락되기 전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중국군 사령관 탕성즈는 자신의 휘하 부대와 난징 성에 고립된 민간인들을 뒤로 한 채, 양쯔 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쳤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피난을 떠나지 못한 채 남아있던 약 60만60만명의 명의 난징 시민들과남경시민들과 군인들은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1937년]] [[12월 13일]]부터 약 6주 동안6주동안 일본군은 중국 민간인들과중국민간인들과 군인들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살육, 방화, 강간 등을따위를 자행했다저질렀다.<ref>자세한 내용은 [[아이리스 장]]의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에서 언급된다.</ref>
 
=== 전쟁의 고착화와 전쟁의 확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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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이 들어서면서 일본의 패색이 더욱 짙어졌다. 미국이 [[8월 6일]]에는 히로시마에,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곧이어 소련도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며 '[[만주 전략공세작전]]'을 감행했다. 결국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9월 2일]] 미국 군함 미주리호에서 정식 항복문서가 조인됨으로써 [[태평양 전쟁]]과 함께 중일 전쟁도 막을 내렸다. 참고로 중국 주재 일본군은 9월 9일에 난징에서 정식 항복 문서가 조인됨에 따라 그때 정식으로 중화민국에 항복하였다.
 
=== 종전 후와종전뒤와 전쟁의 영향 ===
중일 전쟁 기간 중, 중국 대륙의 주요 도시들은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하였고 수많은 중국인들이 희생되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여 전쟁이 끝나자, 평화를 바라던 중국인들의 열망에 따라 [[국공 내전|내전]]을 피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간의 회담이 열렸는데, 여기서 '쌍십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이 협정을 무시하고 [[국민정부]]에게 계속 군사적 도발을 감행하여 [[장제스]]는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였고, [[국공 내전]]이 재발발하게 되었다. 국민당은 내전에서 공산당에 패하여 1949년 12월 [[타이완]]으로 [[국부천대|정부를 옮겼다]]. 한편,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면서 중국은 분단되었다.
 
중일전쟁은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제2차세계대전]]과 [[1941년]] 발발한 [[태평양 전쟁태평양전쟁]]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고 있으나, 일본일본제국이 제국이 중국 대륙을중국대륙을 침략하지 않았다면 태평양 전쟁은태평양전쟁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역사에서동아시아역사에서 매우 큰 전환점이 된 중요한 전쟁 중 하나이다전쟁가운데하나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1939년]] [[9월 1일|9월1일]] [[나치 독일나치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제2차 세계대전제2차세계대전]]의 시작으로 보는 유럽 중심의유럽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1937년]] [[7월 7일|7월7일]] 발발한 중일 전쟁을중일전쟁을 [[제2차 세계대전제2차세계대전]]의 시작으로 봐야 한다는봐야한다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 같이 보기같이보기 ==
* [[청일 전쟁청일전쟁]]
* [[만주 사변만주사변]]
* [[국공 내전국공내전]]
* [[태평양 전쟁태평양전쟁]]
*[[만주전략공세작전]]
* [[만주 전략공세작전]]
* [[난징 대학살남경대학살]]
*[[731부대|731 부대]]
* [[위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