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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노 원정 ===
무제의 부황 경제는 오초칠국의 난 때 흉노와 새로 화친했고 무제도 경제의 화친을 이어받았는데, 원광 원년(기원전 134년) 먼저 화친을 깨고 마읍의 노인 섭일(聶壹)에게 흉노를 유인하게 하고 군사를 매복해 흉노를 치려 했다. 그러나 매복이 흉노에게 들통나 무제의 계획은 실패했고, 흉노는 한나라의 변경을 다시 약탈하기 시작했다.<ref name=":0">사마천: 《사기》 흉노열전권110 흉노열전제50</ref>
 
마읍 전투 5년 후인 [[원광 (전한)|원광]] 6년(기원전 129년), 무제가 다시 흉노와의 싸움을 개시하면서 [[거기장군]]이 되어 흉노와 싸우러 [[상곡군|상곡]]에서 출진했다. 이때 공손하는 [[운중군|운중]]에서, 공손오는 [[대군 (행정 구역)|대군]]에서, [[이광 (전한)|이광]]은 [[안문군|안문]]에서 각각 1만 기를 이끌고 출전했는데, 나머지 셋이 다 성과가 없거나 대패한 반면 위청만 홀로 공을 세워, 흉노의 후계자를 선정하는 회의인 용성회의가 벌어지는 땅 용성(籠城)까지 이르러 수백 명의 머리를 베었다. 이 공으로 [[관내후]]에 봉해졌다.
 
[[원삭]] 원년(기원전 128년) 봄, 누나 위자부가 아들 여태자 [[유거]]를 낳아 황후가 됐고, 자신은 가을에 3만 명을 이끌고 [[안문군|안문]]에서 출진해 수천 명을 베었다. 그러나 이때에 흉노가 쳐들어와 [[요서군|요서]]태수를 죽이고 [[어양군|어양]]태수도 무찔러 어양을 노략질하고 어양군에 주둔한 [[위위]]·재관장군 [[한안국]]도 무찔렀으며, 안문에서도 사람을 죽이고 약탈했다.<ref name=":0" /><ref>사마천: 《사기》 권108 한장유열전제48</ref><ref>사마천: 《사기》 권111 위장군표기열전</ref><ref>《사기·위장군표기열전》에서는 이 일이 원삭 2년의 일로 기재되어 있는데, 《사기·한장유열전》에서는 원삭 원년에 위청이 원정한 것과 같은 해로 나오고, 동북아재단의 외국전역주에서도 원삭 원년으로 나온다.</ref> 원삭 2년(기원전 127년), 이식(李息)과 함께 흉노 원정을 맡아 이식은 [[대군 (행정 구역)|대]]에서, 자신은 운중에서 출진했다. 서쪽으로 고궐(高闕)에 이르러 황하 이남의 [[허타오]] 지역을 흉노로부터 빼앗았고, 더 나아가 [[농서군|농서]]에 이르렀으며, 포로 수천 명과 가축 수십만 마리를 얻었으며, 흉노의 두 왕 백양왕(白羊王)과 누번왕(樓煩王)을 패주시켰다. 이 승리로 획득한 허타오 지역에 한나라는 [[삭방군]]을 설치했다.
[[원삭]] 원년(기원전 128년) 가을, 3만 명을 이끌고 안문에서 출진해 수천 명을 베었다.
 
전한 시대 동안 무제가 위청을 보내 [[허타오]]지역을 흉노로부터 빼앗았다. (기원전 127년) 점령 후에는 흉노의 공격을 막기 위해 허타오 지역에 계속해서 정착촌을 건설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동안 [[삭방자사부|삭방]]과 [[오원군|오원]]을 설치했다. 이 시기에 내몽고 동부지역은 [[선비족]]이 점령했다. 선비는 이후 흉노가 한에게 굴복한 후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다.
 
분묘(墳墓)는 곽거병의 묘 인근인 무제의 분묘인 [[우부풍|무릉]](茂陵)의 근처에 남아있다.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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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전 ==
* 사마천: 《사기》 권111 위장군표기열전
* 반고: 《한서》 권55 위청곽거병열전제25 중 위청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