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양 (제애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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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조정에서는 [[상국]] [[여산 (전한)|여산]]이 [[대장군]] [[관영 (전한)|관영]]을 파견해 토벌하려 했지만 관영은 여씨 일족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았다. 또한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여씨 일족들이 득을 보는 것이라 생각해, 형양(滎陽)에 주둔하고 제왕을 비롯한 제후왕들에게 여씨 일족이 타도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공문을 보냈고, 제애왕은 국경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여산·[[여록]] 등의 여씨 일족은 주허후와 [[주발]]·[[진평]] 등에게 죽었다. 대신들은 다음 황제를 누구로 하는가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는데, 제애왕의 어머니의 친정인 사(駟)씨 가문이 악인들이라는 이유로 제애왕은 선택되지 않고 대신 고조의 넷째 아들인 [[대왕 (전한대나라)|대나라대왕]] [[전한 문제|유항]]이 추대되었다(문제).<ref>문제는 기원전 202년생이며, 제애왕의 동생 성양경왕은 기원전 200년생이므로, 문제가 비록 제애왕의 작은아버지지만 나이는 오히려 제애왕이 더 많을 수도 있다.</ref> 제애왕은 군사를 이끌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문제는 제애왕이 여씨에게 빼앗긴 낭야군·제남군에 제도혜왕 때에 여씨가 빼앗은 [[성양군]]까지 제나라에 돌려주었다.
 
문제 원년(기원전 179년)에 죽으니 [[시호]]를 [[애 (시호)|애]](哀)라 하였고, 작위는 아들 [[유칙]]이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