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엇 터브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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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 터브먼'''({{llang|en|Harriet Tubman}}, 본명 '''아라민타 로스'''({{llang|en|Araminta Ross}}), [[1822년]] ~ [[1913년]] [[3월 10일]])은 노예 해방 운동을 실천한 [[인권]]운동가이자 [[미국 남북 전쟁|남북 전쟁]] 당시 활동했던 노예 폐지론자, [[간첩]]이다.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던 그는 탈출 후, ‘[[지하철도 (비밀결사)|지하 철도지하철도]]’라는 반노예 운동가 네트워크와 아지트를 통해 해방 시설 열세 곳을 세워, 노예 칠십여 명을 구하였다.<ref name="13-70" /> 해리엇은 1850년부터 1860년까지 '지하 철도지하철도'의 차장으로서 남부에 들어가 300명이 넘는 흑인들을 북부로 탈출시켰다.<ref name="korq">{{웹 인용|url=http://weekly.hankooki.com/lpage/woman/200401/wk2004012920581737520.htm|제목=〈역사 속 여성이야기〉 해리엇터브먼|성=김|이름=정미|출판사=주간한국|날짜=2004-01-29|확인날짜=2009-07-01 }}</ref> 이후 그는 [[노예폐지론자]] [[존 브라운]]을 도와 [[하퍼즈페리]]를 습격할 사람들을 모았으며, 전쟁 이후에는 여성 참정권을 위해 싸웠다.
[[메릴랜드주]] [[도체스터군 (메릴랜드주)|도체스터군]]에서 태어난 터브먼은, 수많은 주인들에 의해 구타당하고 채찍질 당하였다. 어릴 적, 그는 화난 노예 주인이 다른 노예에게 던졌던 철 아령에 실수로 맞아 머리에 상처를 입었다. 상처로 인해 그는 평생 [[발작]], [[두통]], 수면과다에 시달렸으나, 대신 꿈을 생생하게 꾸게 되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는 생생한 꿈을 하나님이 계시한 징조로 받아들였다.
 
[[1849년]], 터브먼은 [[필라델피아]]로 도망쳤다가, 바로 [[메릴랜드]]로 그의 가족을 구해내기 위해 돌아왔다. 천천히, 한 번에 한 그룹씩, 그는 자신의 친척들을 주 밖으로 데리고 나갔으며, 결국 수십 명의 노예에게 자유를 찾아주었다. 아주 은밀하게 밤에만 움직였던 터브먼(이때부터 하비루<ref>하비루는 히브리 민족 즉, [[유대인]]이라는 특정[[민족]]만 뜻하는 게 아니라 이집트 [[사회]]에서 하류층을 차지하던 [[민중]]을 뜻한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의하면 이집트 왕실의 시위대장 [[보디발]] 장군의 부인은 집사신분의 [[노비]]인 요셉에게 성적인 유혹을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요셉]]을 가리켜 "보디발이 데려온 히브리 종놈"이라고 부르며 멸시하였다.</ref> 를 구약성서의 [[출애굽기]]에 따르면 [[유대]]민족을 [[이집트]]의 착취와 억압에서 구원한“[[모세]]”라고 불렸다)은 “한 번도 손님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 덕분에 탈출한 사람들에겐 거액의 [[현상금]]이 걸리곤 하였지만, 그들을 돕는 게 해리엇 터브먼인 것은 아무도 몰랐다. [[도망노예법]]이 제정된 때에는, 그는 도망친 노예들을 [[캐나다]]까지 갈 수 있게 도와주었으며, 동시에 그들에게 [[직업]]을 찾아주기도 하였다.
 
[[미국 남북 전쟁|남북 전쟁]] 발발 후, 터브먼은 [[북군|연합군]]을 위해, 처음에는 [[요리사]]이자 [[간호사]]로, 그 다음은 무장 [[정찰병]]이자 간첩으로 활약하였다. 전쟁에서 탐험대를 이끈 첫 여성이 된 그는, [[콤바히 강콤바히강]]을 습격하여 700명이 넘는 노예들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전쟁 후, 그는 은퇴한 후 [[뉴욕뉴욕주]] [[오번 (뉴욕주)|오번]]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노부모를 돌봤다. 병 때문에 편히 움직일 수 없게 될 때까지 그는 여성 참정권을 위해서도 열심히 싸웠으며, 이후 자신의 도움으로 몇 년 일찍 세워진 흑인 양로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그 후에 페렴으로 죽게 되었다.
 
== 가족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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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기 ==
 
어머니가 곧 “큰 집”에서 일하게 되어 가족을 돌볼 시간이 없어지자, 어린 터브먼이 동생들을 돌보게 되었다.<ref>Humez, p. 13.</ref> 5~6세 때, 그는 “미스 수잔”이라는 여자에게 아이 보는 여자로 고용되었다. 터브먼은 아기가 잘 자는지 지켜보는 역을 맡았다. 아기가 깨어나 울기 시작하면, 터브먼은 채찍질을 당했다. 그는 아침 식사를 하기도 전에 다섯 번을 채찍질 당했던 날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이때의 상처는 평생 그의 몸에 남았다.<ref>Clinton, pp. 17–18.</ref> 이후 설탕 덩어리를 훔쳤다는 누명을 쓴 터브먼은, 이웃집의 돼지우리에 5일 동안 숨어 지냈으며, 여기서 동물들의 사료로 배를 채우곤 하였다. 굶주린 상태로, 그는 미스 수잔의 집으로 돌아왔으며 심한 구타를 당하였다.<ref>Larson, p. 40.</ref> 이후 그런 학대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그는 옷을 여러 겹 껴입었으며, 혹여 구타당하려 할 때는 소리를 질렀다.<ref name="Cli19">Clinton, p. 19.</ref> 언젠가, 그는 벌을 받는 도중 백인의 무릎을 깨물었다. 이후, 그는 그와 간격을 유지하였다.<ref name="Cli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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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과 결혼 ==
 
[[1840년]], 터브먼의 아버지가 전 주인의 [[유서]]에 따라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 그는 자신을 소유했던 탐슨 가족 아래서 계속 목재 평가인과 십장(什長)으로서 일하였다.<ref>Clinton, pp. 23–24.</ref> 몇 년 후, 터브먼은 백인 변호사에게 5달러를 지불하고 그의 어머니가 가진 법적 지위를 확인해 보았다. 변호사는 전 주인이 릿도 그의 남편과 마찬가지로 45세에 자유가 될 것을 명시해 놓은 것을 발견하였다. 릿의 아이들 역시 비슷한 조건이었으며, 45세 이후 태어난 아이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자유인 것을 암시하였다. 하지만 패티슨과 브로디스 가족은 그런 사항들을 무시하였으며, 그 일이 실현되는 것은 보는 것은 터브먼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ref>Clinton, pp. 28–2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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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arriet Tubman Reward Notice 1849.jpg|섬네일|left|250px|캠브릿지 “민주당”에 오른, 아라민타 (민티)와 그의 형제 헨리와 벤에 300달러의 현상금을 내건 공고]]
=== 탈출 ===
터브먼과 그의 형제 벤, 헨리는 1849년 9월 17일 탈출하였다. 터브먼은 당시 캐롤라인군에서 포플라포플러 넥이라는 [[플랜테이션]]을 경영하고 있던 앤서니 탐슨 박사 밑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의 형제도 거기서 일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예들이 다른 곳에 가 일하고 있었던 관계로, 일라이자 브로디스는 처음에는 그들의 탈출 사실을 못 알아챈 것 같다. 하지만 2주 후, 그는 캠브릿지 “민주당”에, 노예 셋 중 하나를 잡을 때마다 100달러를 주겠다는 현상금 [[포스터]]를 내걸었다.<ref>Larson, p. 78.</ref> 터브먼의 두 형제는 또 나름대로 떠난 후 생각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벤은 아버지가 막 된 참이었으며, 둘은 결국 앞에 놓인 위험에 겁을 먹고 스스로 다시 돌아갔다. 그로 인해 터브먼도 그들과 함께 돌아가야만 했다.<ref>Larson, pp. 78–79.</ref>
 
얼마 안 가 터브먼은 이번에는 홀로 탈출을 감행하였다.<ref name="Lar80">Larson, p. 80.</ref> 그는 탈출하기 전, [[어머니]]에게 자신이 떠난다는 사실을 알리려하였다. 그는 믿음직한 친구였던 매리를 찾아, 암호처럼 쓰이던 작별의 노래를 불렀다. "아침에 보자꾸나, 나는 약속된 땅으로 간다."<ref name="QBra19">Bradford (1971), p. 19.에서 인용</ref>
 
=== 지하철도 ===
그가 정확히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터브먼은 ‘[[지하 철도지하철도]]’(Undergraund)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광역 [[네트워크]]를 활용하였다. 이 비공식적이지만 잘 짜여진 조직망은 자유 흑인, 백인 노예 폐지론자, 그리고 기독교인 운동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독교인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기독교]] [[공동체]]로는 종종 [[퀘이커]]라 불리는 [[친우회]] 조직이 있었다.<ref name="Lar80"/> [[퀘이커]]와 [[메노나이트]] 교회는 미국 [[개신교]] 교회에서 마이너리티였지만,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는 달리 [[역사]]적, [[사회]]적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콘텍스트]]적(상황적)해석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교회였고, [[노예제]]에 대해서도 성서의 [[인권]]사상에 근거하여 투쟁했다.<ref>《두 얼굴을 한 하나님,성서를 통해서 본 노예제》(김형인, 살림)</ref>
 
[[캐롤라인군]]의 포플라넥포플러 넥 근처의 프레스턴 지역은 퀘이커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으므로, 터브먼이 탈출 과정에서 적어도 한 번은 경유해간 지점이라 생각된다.<ref>Larson, p. 81.</ref> 그곳에서 그는 도주 노예들이 일반적으로 택하는 길을 따라갔다: [[촙탱크 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델라웨어]]를 지나 [[펜실베이니아]]로 북쪽으로 간 것이다.<ref name="korq2"/><ref name="Cli37">Clinton, p. 37.</ref> 145 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여행은, 도보로만 갈 경우 최소 5일에서 최대 3주까지 걸리는 길이었다.<ref>Clinton, p. 38.</ref>
 
=== 여러 동지들의 도움 ===
여행의 위험한 조건 때문에 터브먼은 밤에만 움직이면서 ([[북극성]]을 길잡이로 잡아) “노예사냥꾼”들의“노예 사냥꾼”들의 눈을 피해야했다피해야 했다.<ref>Clinton, pp. 37–38.</ref> 지하 철도의지하철도의 “차장”은 숨어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변장을 썼다. 예를 들어 초반의 ‘정거장’ 중 하나에선, 집주인이 터브먼에게 마당을 쓸라고 말하여 마치 터브먼이 그 집의 노예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밤이 오면, 가족은 그를 카트에 숨겨 다음 집으로 옮겨주었다.<ref>Larson, p. 83.</ref> 그가 그 지역의 숲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낮에는 숲 속에 숨었을 가능성도 있다.<ref name="Cli37"/> 그가 택한 경로는 다른 노예들도 탈출시 이용하는 경로이므로 외부에 노출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터브먼은 이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야기했다.
 
=== 자유에 대한 경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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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머지 가족들을 구하려 하다 ===
다음 봄, 그는 메릴랜드로 돌아와 나머지 가족들을 빼내려는 결심을 하였다.<ref name="korq2"/> 두 번째 여행에서 그는 자신의 형제 모세와 다른 두 명의 노예를 구해냈다.<ref name=Larson90>Larson, p. 90.</ref> 이때 터브먼은 [[윌밍턴 (델라웨어주)|윌밍턴]]의 노예 폐지론자 퀘이커 교도퀘이커교도 토머스 가렛과 함께 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ref>Clinton, p. 82.</ref> 그의 업적을 듣고 그의 가족은 용기를 냈으며, 실제 오늘날의 전기 작가들도 그가 메릴랜드로 올 때마다 더욱 자신감이 커졌을 거라 말하고 있다.<ref name=Larson90/><ref>Clinton, p. 80.</ref> 더 많은 사람들을 노예 제도에서 구출해내면서, 그는 “모세”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졌다. 이는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해방의 하나님이신 [[야훼]]의 뜻에 따라 하비루 즉, [[이집트]]에서 억압과 착취를 받던 [[민중]]을 해방한 것에 빗댄 것이다.<ref>Clinton, p. 85.</ref>
 
=== 동지들 ===
[[1879년]] 작가 윌버 시버트와 한 인터뷰에서, 터브먼은 그가 지하 철도에서지하철도에서 사용하였던 장소와 도우미의 이름을 일부 밝혔다. 그는 메릴랜드의 자유흑인 샘 그린 목사와 함께 지냈었다;지냈으며, 또한 포플라포플러 넥에 있는 그의 부모의 집 근처에도 숨었었다. 거기서 동북쪽으로 가 델라웨어의 샌드타운과 윌로우 그로브를 거쳐, 자유 흑인 요원 윌리엄 브링클리, 냇 브링클리와 에이브러험 깁스가 있는 캠든에 도착하였다. 세 요원은 그를 도버와 블랙버드 지역을 지나 북쪽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었으며, 다른 요원들은 체사피크와 델라웨어 운하를 지나 뉴캐슬과 윌밍턴 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윌밍턴에선, 퀘이커 교도퀘이커교도 토머스 가렛이 윌리엄 스틸의 사무실이나 다른 지하 철도지하철도 차장의 집으로 그를 안전히 데려다주곤 하였다. 유명한 흑인 요원이었던 스틸은 수백 명의 노예들을 뉴욕, 뉴잉글랜드와 캐나다 쪽으로 안전하게 데려다준 업적이 있는 사람이다.<ref>Larson, p. 134-135.</ref>
 
=== 도체스터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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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감함 ===
그는 [[리볼버]]를 들고 다녔으며,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일단 그의 여행에 따라나선 사람은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그가 돌아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쏴버리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었다.<ref name="korq2"/><ref>Clinton, pp. 90–91.</ref> 한때 터브먼이 이끌던 어느 탈출자 그룹의 사기가 저하되어, 한 사람이 계속 [[플랜테이션]]으로 돌아가겠다고 우겼던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그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계속 가거나 죽거나예요."<ref>Conrad, p. 14에서 인용</ref> 그런 일이 있은지 수 일 후, 돌아가겠다고 했던 사람은 무사히 나머지 그룹과 함께 [[캐나다]]에 도착하였다.<ref name="Cli91"/> 터브먼이 권총을 들고 다녔던 것은 아마도 주변에 상존했던 노예사냥꾼들과노예 사냥꾼들과 그들의 사냥개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탈하려는 탈출자들에게 권총을 겨누었던 것은 엄격한 지휘자로서 그의 결단력을 환기시켜 탈출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의도였다.<ref name="korq"/><ref name="korq2"/> 한편 지역의 노예 주인들은 키 작고 몸도 편치 않았던 “민티”가 수많은 노예의 탈출을 도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실제로, 1850년대 후반에 그들은 노예 도주를 돕고 있는 사람이 어떤 북부 출신 백인 노예 폐지론자라 의심하기도 하였다. 또 존 브라운이 동부 해안으로 와 노예들을 데리고 간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다.
 
=== 현상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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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번과 마가렛 ==
=== 1,200달러의 획득 ===
[[1859년]] 초, 노예 폐지론자인 [[윌리엄 H. 수어드]] 상원 의원이 터브먼에게 [[뉴욕뉴욕주]] [[오번 (뉴욕주)|오번]] 외곽에 있는 작은 땅을 1,200달러에 팔았다.<ref>Larson, p. 163.</ref> 그 도시는 반노예주의의 온상이었으며, 터브먼은 그의 부모를 캐나다의 혹한으로부터 데리고 나왔다.<ref name="Cli117">Clinton, p. 117.</ref> 미국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도망노예송환법에 의해 그들이 남부로 다시 송환될 수 있는 위험에 놓인다는 것이었으며, 터브먼의 형제들 역시 거부감을 보였다. 캐서린 클린턴은 [[드레드 스콧 판결]] 사건으로 인한 분노가 터브먼을 미국으로 다시 데려온 것이라고 보았다.<ref name="Cli117"/> 오번의 그의 지역은 터브먼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안식처가 되었다. 몇 년간, 그는 친척들과 다른 흑인들을 위해 안전한 곳을 찾아주었다.<ref name="Larson"/>
 
=== 마가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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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브먼은 [[포트 로열]]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약초로 약을 만들어 [[적리]]로 고생하는 군인들을 도왔다.<ref name="korq2"/> 또 [[천연두]]에 걸린 사람들을 돕기도 하였는데, 그가 전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은 신에게 축복받았다는 소문이 더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ref>Clinton, p. 157.</ref> 처음에 정부는 그에게 이런 일들에 대해 급여를 지급하였으나, 새로이 자유가 된 흑인들이 그가 특별대우를 받는다 생각했다. 긴장을 풀기 위해, 그는 급여를 포기하고, 저녁에 파이와 맥주를 만들어 다음 날 파는 식으로 하여 돈을 벌었다.<ref>Clinton, pp. 156–157.</ref>
 
=== 정찰과 콤바히 강콤바히강 습격 ===
[[1863년]] [[1월 1일]] 드디어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 선언]]을 하였을 때, 터브먼은 이것을 모든 흑인의 자유로 이끄는 중요한 단계라고 생각하였다.<ref>Larson, p. 209.</ref> 그는 [[남부동맹]]의 패배를 위해 일하는 각오를 새롭게 하였으며, 얼마 안 가 포트 로열 근처의 지대를 정찰하는 부대를 이끄는 자리를 맡게 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늪과 강은 메릴랜드 동부 해안의 환경과 비슷하였다; 그렇기에 그의 잠복 이동과 속임수 기술에 대한 지식은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다.<ref>Larson, p. 210.</ref> 그의 그룹은, 전쟁 장관 [[에드윈 스탠턴]]의 지휘 아래, 낯선 지형과 그곳의 거주민을 답사하였다.<ref name="Cli164">Clinton, p. 164.</ref> 이후 그는 제임스 몽고메리 장군에게 자신의 여러 지식을 전하면서 [[잭슨빌]]의 정복을 도왔다.<ref name="Cli164"/>
 
[[파일:Harriet Tubman Civil War Woodcut.jpg|섬네일|left|250px|[[남북 전쟁]] 당시의 의상을 입은 터브먼을 새긴 [[목판화]]]]
 
그 후, 터브먼은 남북 전쟁 중 무장 군대를 이끌고 처음으로 공격 작전을 수행한 여성이 되었다.<ref>Larson, p. 212.</ref> 몽고메리와 그의 부대가 [[콤바히 강콤바히강]] 근처의 여러 플랜테이션을 습격하였을 때, 터브먼은 고문으로써 습격을 도왔다. [[1863년]] 6월 2일 아침, 터브먼은 세 척의 증기선을 남부동맹 영역으로 인도하였다.<ref>Clinton, p. 165.</ref> 해안 상륙 후, 북부 연방군은 플랜테이션에 불을 질러, 동맹군의 경제 기반을 무너뜨리고 수천 달러어치의 음식과 보급품을 손에 넣었다.<ref name="Lar213">Larson, p. 213.</ref> 증기선이 기적을 울리자, 그 지역의 노예들은 자신들이 자유가 되었음을 직감하였다. 터브먼은 노예들이 보트로 몰려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훗날 그는 "그런 광경은 본 적이 없어요."<ref>Clinton, p. 166에서 인용</ref>}}라고 말했다. 아직 김이 나는 쌀 한 포대를 메고 달리는 여자들, 어깨에 메여 신음하는 돼지들, 부모들 목에 매달려있는 아기들이 얽히고설키는 혼란을 묘사하였다. 그들의 주인들이 권총과 채찍을 가지고 집단 탈출을 막아보려 하였으나, 그들의 노력은 거의 허사였다.<ref name="Lar213"/> 동맹군이 막 현장에 도착했을 때, 증기선은 이미 노예들을 싣고 사우스캐롤라이나 보포트를 향해 출발한 후였다.<ref>Clinton, p. 167.</ref>
 
700명 이상의 노예가 콤바히 강콤바히강 습격을 통해 구출되었다<ref>Larson, p. 214.</ref><ref>Clinton, p. 166.</ref> 신문은 터브먼의 “애국심, 총명함, 힘 그리고 능력”을 주요 기사로 다루었으며,<ref>Larson, p. 216에서 인용함</ref> 징병 노력으로도 많은 칭찬을 받았다: 자유가 된 많은 흑인들은 대부분 연방군에 합류하였다.<ref>Larson, p. 216.</ref> 터브먼은 이후 로버트 굴드 쇼 장군의 와그너 요새 습격을 도왔으며, 그의 마지막 식사도 그가 제공했다고 알려졌다.<ref>Larson, p. 220.</ref> 그는 그때 전투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인용문2|그때 우린 번개를 보았고, 곧이어 총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천둥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은 더 큰 총들이었다; 그리고 빗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은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겨우 수확을 하러 갈 때가 되었을 때, 우리가 거둔 것은 시체뿐이었다.<ref>Conrad, p. 40에서 인용</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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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리교감독시온교회, 병, 그리고 죽음 ===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터브먼은 오번의 [[감리교감독시온교회]]({{llang|en|Methodist Episcopal Zion Church }}<ref>미국 [[감리교]]의 흑인 감리교회 교단이다. 백인과 흑인의 차별이 심하던 19세기 시절 인종차별주의 백인들의 반대와 공격을 피하기 위해 북 감리교회가 흑인 선교를 위해 구분하여 설립한 감리교회이다. 현재도 감리교의 감독제를 따르고, 미국의 연합감리교회와 협력하여 선교와 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2015년 인종차별주의자 백인이 총격을 가했던 사우스캐롤리나 주의 흑인 교회가 소속된 교단이다. </ref>)에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1903년]],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땅 조금을 [[교회]]에 기부하였으며, “나이 들고 궁핍한 흑인들”을 위한 집을 위해 써달라고 부탁하였다.<ref>Clinton, p. 209에서 인용</ref> 5년 후에야 그런 집들이 지어졌으며, 거주민들에게 교회가 100달러씩의 입주비를 걷는 걸 보고 터브먼은 매우 불쾌해하며 말했다. "그들이 100달러 없이는 들어올 수 없다는 그런 규칙을 만들어놨더군요. 나라면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들어올 수 없다는 규칙을 세웠을 텐데요."<ref>Larson, p. 285에서 인용</ref>}} 그는 이 새로운 규칙을 싫어하였으나, 이후 1908년 6월 23일에 열린 해리엇 양로원에서 그는 명예 초청객이었다.<ref name="korq"/><ref>Clinton, pp. 209–210.</ref>
[[파일:Harriet Tubman late in life3.jpg|right|섬네일|250px|해리엇 터브먼, 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