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엇 터브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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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 터브먼'''({{llang|en|Harriet Tubman}}, 본명 '''아라민타 로스'''({{llang|en|Araminta Ross}}), [[1822년]] ~ [[1913년]] [[3월 10일]])은 노예 해방 운동을 실천한 [[인권]]운동가이자 [[미국 남북 전쟁|남북 전쟁]] 당시 활동했던 노예 폐지론자, [[간첩]]이다.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던 그는 탈출 후, ‘[[지하철도 (비밀결사)|
[[메릴랜드주]] [[도체스터군 (메릴랜드주)|도체스터군]]에서 태어난 터브먼은, 수많은 주인들에 의해 구타당하고 채찍질 당하였다. 어릴 적, 그는 화난 노예 주인이 다른 노예에게 던졌던 철 아령에 실수로 맞아 머리에 상처를 입었다. 상처로 인해 그는 평생 [[발작]], [[두통]], 수면과다에 시달렸으나, 대신 꿈을 생생하게 꾸게 되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는 생생한 꿈을 하나님이 계시한 징조로 받아들였다.
[[1849년]], 터브먼은 [[필라델피아]]로 도망쳤다가, 바로 [[메릴랜드]]로 그의 가족을 구해내기 위해 돌아왔다. 천천히, 한 번에 한 그룹씩, 그는 자신의 친척들을 주 밖으로 데리고 나갔으며, 결국 수십 명의 노예에게 자유를 찾아주었다. 아주 은밀하게 밤에만 움직였던 터브먼(이때부터 하비루<ref>하비루는 히브리 민족 즉, [[유대인]]이라는 특정[[민족]]만 뜻하는 게 아니라 이집트 [[사회]]에서 하류층을 차지하던 [[민중]]을 뜻한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의하면 이집트 왕실의 시위대장 [[보디발]] 장군의 부인은 집사신분의 [[노비]]인 요셉에게 성적인 유혹을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요셉]]을 가리켜 "보디발이 데려온 히브리 종놈"이라고 부르며 멸시하였다.</ref> 를 구약성서의 [[출애굽기]]에 따르면 [[유대]]민족을 [[이집트]]의 착취와 억압에서 구원한“[[모세]]”라고 불렸다)은 “한 번도 손님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 덕분에 탈출한 사람들에겐 거액의 [[현상금]]이 걸리곤 하였지만, 그들을 돕는 게 해리엇 터브먼인 것은 아무도 몰랐다. [[도망노예법]]이 제정된 때에는, 그는 도망친 노예들을 [[캐나다]]까지 갈 수 있게 도와주었으며, 동시에 그들에게 [[직업]]을 찾아주기도 하였다.
[[미국 남북 전쟁|남북 전쟁]] 발발 후, 터브먼은 [[북군|연합군]]을 위해, 처음에는 [[요리사]]이자 [[간호사]]로, 그 다음은 무장 [[정찰병]]이자 간첩으로 활약하였다. 전쟁에서 탐험대를 이끈 첫 여성이 된 그는, [[
== 가족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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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기 ==
어머니가 곧 “큰 집”에서 일하게 되어 가족을 돌볼 시간이 없어지자, 어린 터브먼이 동생들을 돌보게 되었다.<ref>Humez, p. 13.</ref> 5~6세 때, 그는 “미스 수잔”이라는 여자에게 아이 보는 여자로 고용되었다. 터브먼은 아기가 잘 자는지 지켜보는 역을 맡았다. 아기가 깨어나 울기 시작하면, 터브먼은 채찍질을 당했다. 그는 아침 식사를 하기도 전에 다섯 번을 채찍질 당했던 날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이때의 상처는 평생 그의 몸에 남았다.<ref>Clinton, pp. 17–18.</ref> 이후 설탕 덩어리를 훔쳤다는 누명을 쓴 터브먼은, 이웃집의 돼지우리에 5일 동안 숨어 지냈으며, 여기서 동물들의 사료로 배를 채우곤 하였다. 굶주린 상태로, 그는 미스 수잔의 집으로 돌아왔으며 심한 구타를 당하였다.<ref>Larson, p. 40.</ref> 이후 그런 학대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그는 옷을 여러 겹 껴입었으며, 혹여 구타당하려 할 때는 소리를 질렀다.<ref name="Cli19">Clinton, p. 19.</ref> 언젠가, 그는 벌을 받는 도중 백인의 무릎을 깨물었다. 이후, 그는 그와 간격을 유지하였다.<ref name="Cli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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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과 결혼 ==
[[1840년]], 터브먼의 아버지가 전 주인의 [[유서]]에 따라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 그는 자신을 소유했던 탐슨 가족 아래서 계속 목재 평가인과 십장(什長)으로서 일하였다.<ref>Clinton, pp. 23–24.</ref> 몇 년 후, 터브먼은 백인 변호사에게 5달러를 지불하고 그의 어머니가 가진 법적 지위를 확인해 보았다. 변호사는 전 주인이 릿도 그의 남편과 마찬가지로 45세에 자유가 될 것을 명시해 놓은 것을 발견하였다. 릿의 아이들 역시 비슷한 조건이었으며, 45세 이후 태어난 아이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자유인 것을 암시하였다. 하지만 패티슨과 브로디스 가족은 그런 사항들을 무시하였으며, 그 일이 실현되는 것은 보는 것은 터브먼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ref>Clinton, pp. 28–2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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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arriet Tubman Reward Notice 1849.jpg|섬네일|left|250px|캠브릿지 “민주당”에 오른, 아라민타 (민티)와 그의 형제 헨리와 벤에 300달러의 현상금을 내건 공고]]
=== 탈출 ===
터브먼과 그의 형제 벤, 헨리는 1849년 9월 17일 탈출하였다. 터브먼은 당시 캐롤라인군에서
얼마 안 가 터브먼은 이번에는 홀로 탈출을 감행하였다.<ref name="Lar80">Larson, p. 80.</ref> 그는 탈출하기 전, [[어머니]]에게 자신이 떠난다는 사실을 알리려하였다. 그는 믿음직한 친구였던 매리를 찾아, 암호처럼 쓰이던 작별의 노래를 불렀다. "아침에 보자꾸나, 나는 약속된 땅으로 간다."<ref name="QBra19">Bradford (1971), p. 19.에서 인용</ref>
=== 지하철도 ===
그가 정확히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터브먼은 ‘[[
[[캐롤라인군]]의
=== 여러 동지들의 도움 ===
여행의 위험한 조건 때문에 터브먼은 밤에만 움직이면서 ([[북극성]]을 길잡이로 잡아)
=== 자유에 대한 경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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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머지 가족들을 구하려 하다 ===
다음 봄, 그는 메릴랜드로 돌아와 나머지 가족들을 빼내려는 결심을 하였다.<ref name="korq2"/> 두 번째 여행에서 그는 자신의 형제 모세와 다른 두 명의 노예를 구해냈다.<ref name=Larson90>Larson, p. 90.</ref> 이때 터브먼은 [[윌밍턴 (델라웨어주)|윌밍턴]]의 노예 폐지론자
=== 동지들 ===
[[1879년]] 작가 윌버 시버트와 한 인터뷰에서, 터브먼은 그가
=== 도체스터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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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감함 ===
그는 [[리볼버]]를 들고 다녔으며,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일단 그의 여행에 따라나선 사람은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그가 돌아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쏴버리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었다.<ref name="korq2"/><ref>Clinton, pp. 90–91.</ref> 한때 터브먼이 이끌던 어느 탈출자 그룹의 사기가 저하되어, 한 사람이 계속 [[플랜테이션]]으로 돌아가겠다고 우겼던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그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계속 가거나 죽거나예요."<ref>Conrad, p. 14에서 인용</ref> 그런 일이 있은지 수 일 후, 돌아가겠다고 했던 사람은 무사히 나머지 그룹과 함께 [[캐나다]]에 도착하였다.<ref name="Cli91"/> 터브먼이 권총을 들고 다녔던 것은 아마도 주변에 상존했던
=== 현상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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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번과 마가렛 ==
=== 1,200달러의 획득 ===
[[1859년]] 초, 노예 폐지론자인 [[윌리엄 H. 수어드]] 상원 의원이 터브먼에게 [[
=== 마가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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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브먼은 [[포트 로열]]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약초로 약을 만들어 [[적리]]로 고생하는 군인들을 도왔다.<ref name="korq2"/> 또 [[천연두]]에 걸린 사람들을 돕기도 하였는데, 그가 전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은 신에게 축복받았다는 소문이 더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ref>Clinton, p. 157.</ref> 처음에 정부는 그에게 이런 일들에 대해 급여를 지급하였으나, 새로이 자유가 된 흑인들이 그가 특별대우를 받는다 생각했다. 긴장을 풀기 위해, 그는 급여를 포기하고, 저녁에 파이와 맥주를 만들어 다음 날 파는 식으로 하여 돈을 벌었다.<ref>Clinton, pp. 156–157.</ref>
=== 정찰과
[[1863년]] [[1월 1일]] 드디어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 선언]]을 하였을 때, 터브먼은 이것을 모든 흑인의 자유로 이끄는 중요한 단계라고 생각하였다.<ref>Larson, p. 209.</ref> 그는 [[남부동맹]]의 패배를 위해 일하는 각오를 새롭게 하였으며, 얼마 안 가 포트 로열 근처의 지대를 정찰하는 부대를 이끄는 자리를 맡게 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늪과 강은 메릴랜드 동부 해안의 환경과 비슷하였다; 그렇기에 그의 잠복 이동과 속임수 기술에 대한 지식은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다.<ref>Larson, p. 210.</ref> 그의 그룹은, 전쟁 장관 [[에드윈 스탠턴]]의 지휘 아래, 낯선 지형과 그곳의 거주민을 답사하였다.<ref name="Cli164">Clinton, p. 164.</ref> 이후 그는 제임스 몽고메리 장군에게 자신의 여러 지식을 전하면서 [[잭슨빌]]의 정복을 도왔다.<ref name="Cli164"/>
[[파일:Harriet Tubman Civil War Woodcut.jpg|섬네일|left|250px|[[남북 전쟁]] 당시의 의상을 입은 터브먼을 새긴 [[목판화]]]]
그 후, 터브먼은 남북 전쟁 중 무장 군대를 이끌고 처음으로 공격 작전을 수행한 여성이 되었다.<ref>Larson, p. 212.</ref> 몽고메리와 그의 부대가 [[
700명 이상의 노예가
{{인용문2|그때 우린 번개를 보았고, 곧이어 총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천둥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은 더 큰 총들이었다; 그리고 빗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은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겨우 수확을 하러 갈 때가 되었을 때, 우리가 거둔 것은 시체뿐이었다.<ref>Conrad, p. 40에서 인용</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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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리교감독시온교회, 병, 그리고 죽음 ===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터브먼은 오번의 [[감리교감독시온교회]]({{llang|en|Methodist Episcopal Zion Church
[[파일:Harriet Tubman late in life3.jpg|right|섬네일|250px|해리엇 터브먼,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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