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대 하우 자작 윌리엄 하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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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정보
|이름= 윌리엄 하우<br />''The Viscount Howe''
|생애= [[1729년]] [[8월 10일]] - [[1814년]] [[7월 12일]]
|그림= Gen. Sir William Howe.jpg
|설명=
|별명=
|태어난 곳= [[영국]] [[잉글랜드]]
|죽은 곳= [[영국]] [[트위크넘]]
|복무= [[{{국기|영국]], [[미국]]}}
|복무 기간= ~ [[1799년]] [[12월 14일]]1746년-1803년
|최종 계급=[[3성 장군|중장]]. 북미총사령관
|부대=[[영국군]]{{육군|영국}}
|지휘=1746–1803
|주요 참전 전투/전쟁= [[7년 전쟁]]<br />
[[미국 독립 전쟁]]
|서훈 내역= [[바스 훈장]]
|기타 이력= 의회 의원, 추밀원 고문
|}}
'''제5대 하우 자작 윌리엄 하우''', [[바스 훈장|KB]], [[추밀원 (영국)|PC]] (1729년 8월 10일 – 1814년 7월 12일)는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북아메리카 총사령관을 맡은 것으로 유명한 [[영국 육군]]의 장교이다. 하우는 뛰어난 군사 경력을 보유한 삼형제 중 한 명이었다.
'''윌리엄 하우'''(William Howe, 5th Viscount Howe, [[1729년]] [[8월 10일]] - [[1814년]] [[7월 12일]], [[바스 훈장]] 수상자, 추밀원 고문)는 영국군 장군이며, [[미국 독립 전쟁]] 때 영국군의 총사령관이었다. 군인 가문에서 태어난 당시 하우 삼형제 중 한 사람이었다. [[1775년]] 공을 세워 나이트 작위를 받아 윌리엄 경이라고 불렸으며, 형 [[리처드 하우]]가 [[1799년]]에 사망할 때 이 자작 작위를 계승한다. 하우는 보스턴의 ‘[[벙커 힐 전투]]’에 참가하여 승리는 했지만 브리즈 힐에서 많은 아군의 손실을 기록했으며, 뉴욕 시와 필라델피아 시의 점령 등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새러토가 전투]]’‘’에서 패배하여 프랑스를 전투에 끌어들인 탓에, 부정적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1746년 육군에 입대한 하우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과 [[7년 전쟁]]에서 복무했다. 그는 1759년 [[에이브러햄 평원 전투]]에서 영국군을 이끌고 [[제임스 울프]] 장군이 그의 군대를 상륙시켜 프랑스군과 교전할 수 있도록 안세오플롱에 위치한 절벽을 점령했다. 호우는 [[루이스부르크 공방전]], [[벨레일레 점령]], [[아바나 전투 (1762년)|아바나 전투]] 등의 전역에서도 참여했다. 그는 1795년까지 [[아일오브와이트 총독]]을 맡았다.
== 생애 ==
윌리엄 하우는 제2대 하우 자작 엠마누엘 하우와 샬럿의 막내(셋째) 아들로 영국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샬럿의 모친인 렌스타와 달링턴의 백작 부인 소피아 폰 키엘만세그는 영국 왕 [[조지 1세]]의 사생아였다. 왕가와 족벌 관계가 하우 가문 삼형제의 출세에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삼형제 모두 유능한 장교였던 것도 사실이다. 윌리엄의 맏형 제3대 하우 자작인 [[조지 하우]]도 장군이며, [[1758년]]의 [[카리용 전투|타이컨더로가 요새 전투]] 직전에 전사했다. 차남인 제1대 하우 백작 [[리처드 하우]]는 해군 제독이며, ‘[[미국 독립 전쟁]]’에도 참여를 했다.
 
1775년 3월 북아메리카로 파견된 하우는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5월에 도착했다. [[벙커힐 전투]]에서 큰 대가를 치르고 승리를 거둔 이후, 하우는 9월에 [[토마스 게이지]]의 뒤를 이어 북아메리카 총사령관이 되었다. 하우는 [[뉴욕 뉴저지 전역]]과 [[필라델피아 전역]]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1777년 계획한 영국군의 전역이 실패로 끝나면서 이는 [[존 버고인]]의 [[새러토가 전역]]이 실패하는데 기여했다. 하우가 이런 계획을 짜고 같은 해 영국군에게 가져다 준 패배는 그 당시, 그리고 지금까지도 역사적으로 논쟁이 되고 있다.
 
1776년 승리를 거둔 이후 하우는 [[바스 훈장]]을 수여받았지만, 그는 1777년 북아메리카 총사령관 직에서 사임했다. 1778년 그는 영국으로 돌아와 영국 본토 방위에 전념했다. 1758년부터 1780년까지 그는 [[서민원]]에 있었으며, 1799년 그의 형 [[제1대 하우 백작 리처드 하우|리처드]]가 사망하면서 그는 하우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결혼을 했지만 아이가 없었기에, 1814년 그의 죽음 이후 자작 승계는 끊기게 되었다.
 
== 생애 ==
하우는 1746년, 17살 때 컴벌랜드 공작의 기병 부대에서 소위 자리를 사서 입대했다. 이듬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중위로 플랑드르에서 싸웠다. 전후 제20보병 연대에 들어가 제임스 울프와 친분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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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방면 작전과 동시에 존 버고인 장군은 몬트리올에서 알바니 점령을 목표로 [[새러토가 방면 작전]]의 원정대를 이끌고 있었다. 버고인 군은 취소된 뉴욕에서 알바니 원정군과 합류하게 되었다.
 
== 말기 ==
하우는 [[1778년]]에 사직하여 [[5월 20일]]에 [[헨리 클린턴]]이 북아메리카 파견군의 총사령관을 이어 받았다. [[7월 1일]] 하우가 영국으로 돌아가자 하우와 형 제독은 북아메리카에서 실패한 작전에 대해 비난을 받았다.
 
[[1782년]], 하우는 추밀원 고문이 되었다. 형 리처드가 [[1799년]]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아일랜드 귀족을 이어 제5대 하우 자작되었다. [[1814년]]에 [[플리머스 주지사]]가 되었고, 그해에 사망했다. 투ィ케나무 묘지인 홀리로드에 묻혔다. 하우도 후계자가 없었고, 살아남은 형제도 없었기 때문에, 자작 직으로 그로 끝이났다.
 
{{전거 통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