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관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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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대한민국의 당국회담 예비 접촉 제안 에 응하지 않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1월 26일 예비 접촉을 판문점의 통일각에서 하자고 제안해 왔다. 그리고 11월 27일 남북은 12월 11일 개성공업지구에서 남북간 당국회담을 열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12월 11일부터 12월 12일까지 개성에서 남북당국회담을 열었지만 금강산 입장차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결렬되었다. 2016년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에서 "핵" 대신 "남북관계 개선 노력"을 처음으로 언급하였으나, 1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기습적으로 제4차 핵실험격인 [[수소폭탄]] 실험을 감행하였고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1월 7일 "남북 민간교류,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개성공업지구]] 폐쇄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한 달여 만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광명성 호를 발사하였고,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2월 10일 개성공업지구 가동 중단을 선언하였다. 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개성공업지구 폐쇄를 선언하며 북측 노동자들 전원 추방과 개성공업지구 군사 통제 구역을 선포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비핵화 협상 제안을 일축하며 대북 강경 태세를 취하였다. 대화 제의가 통하지 않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돌연 위협 태세로 태도를 전환하였고, 9월 9일 5차 핵실험을 단행하였다. 이에 박근혜 대통령은 김정은의 실명을 거론하며 김정은을 비판하였고, 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막말로 박근혜 대통령을 비방하는 격앙된 태도를 보였다.한편 국군은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하려는 징후가 포착되면 평양을 지도에서 사라지게 할 것"이라고 강경 태세를 취했다. 이후 11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한창일 때,대한민국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비밀리에 남북 정상 회담을 추진했다고 한다.
 
===문재인정부===
 
== 군사적 대치 ==
[[한국 전쟁]]으로 인해 남북 간의 군사 대치는 유지되고 있다. 1961년부터 2010년 8월까지 남북의 군사 충돌로 국군, 북한군, 미군 1554명이 사망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 한국전 이후 남·북 군사충돌로 1554명 사망 |url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1112150205&code=910303 |출판사 = 경향신문 |저자 = 유신모 |날짜 = 2010-11-11 |확인날짜 = 2010-11-17}}</ref> 북한은 1980년대말 핵처리 시설을 완공한 이후, IAEA의 핵사찰 거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등으로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들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량 살상 무기|북핵 문제]]) 2011년 1월 6일 국회 국방위원회 [[송영선 (1953년)|송영선]]은 1980년대 이후 약 19억1천800만장에 달하는 대북심리전단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살포하였다고 발표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 軍, 1980년대 이후 대북심리전단 19억장 살포 |url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1/06/0200000000AKR20110106198700043.HTML |출판사 = 연합뉴스 |저자 = 김호준 기자 |날짜 = 2011-01-06 |확인날짜 = 2011-01-27}}</ref> 자유선진당 [[이진삼]] 의원은 1960년대 후반 몇명의 대원과 같이 3번의 북파 공작 활동으로 33명의 인민군을 사살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 ‘북한군 33명 살해’ 이진삼 의원 과거사 화제 |url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2071109361&code=910302 |출판사 = 경향신문 |날짜 = 2011-02-07 |확인날짜 = 2011-02-18}}</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