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리 (진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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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리'''(王離, ?~?)는 [[중국]] [[진나라]](秦)의 장군이다. [[전국 시대|전국시대]] 말기에 활약한 진나라의 명장 [[왕전 (전국)|왕전]]의 손자이자 [[왕분 (전국)|왕분]]의 아들이다. [[진 시황제]] 시기에 무성후의 작위를 받았고, [[진 이세황제]] 시기에 변경 수비의 책임자가 되었다가 다시 반란진압에반란 진압에 동원되었으나 [[거록 대전|거록대전]]에서 [[항우]]에게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왕리'''(王離, ?~?)는 [[중국]] [[진나라]](秦)의 장군이다.
 
[[전국 시대|전국시대]] 말기에 활약한 진나라의 명장 [[왕전 (전국)|왕전]]의 손자이자 [[왕분 (전국)|왕분]]의 아들이다. [[진 시황제]] 시기에 무성후의 작위를 받았고, [[진 이세황제]] 시기에 변경 수비의 책임자가 되었다가 다시 반란진압에 동원되었으나 [[거록 대전|거록대전]]에서 [[항우]]에게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 생애 ==
 
=== 진시황 시대 ===
왕리는 진나라의 명장 [[왕전 (전국)|왕전]]의 손자였다.<ref>《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ref>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무성후(武城侯)의 작위를 받았다.<ref>《사기》 권6 진시황본기</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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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초 (춘추 전국)|초나라]]의 [[항우]]가 거록에 고립된 조헐과 장이를 구원하기 위해 장하(漳河)를 건너 왕리를 포위하였다. 왕리는 항우와 9번을 싸워웠으나 모두 패하고 보급로마저 끊어지고 말았다.<ref>《사기》 권7 항우본기 ; 《사기》 권16 진초지제월표</ref> 그리고 다음달인 1월,<ref>당시 중국의 달력은 [[전욱력]]으로, 한해의 시작을 10월로 잡았고 끝을 9월로 잡았다.</ref> 왕리는 항우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는데,<ref>《사기》 권6 진시황본기 ; 《사기》 권7 항우본기 ; 《사기》 권16 진초지제월표 ;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ref> 이 전투를 [[거록 대전|거록대전]]이라 한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 일화 ==
왕리가 처음 조나라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거록성을 포위했을 당시에 어떤 사람이 "왕리는 진나라의 명장(名將)이다. 이제 장차 강력한 진나라의 군대를 거느리고 새로 세워진 조나를 공격할 것이니 반드시 이길 것이다."라 하였다. 그러자 다른 객(客)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무릇 장수가 3대를 이어가면 반드시 패하게 된다. 왜 반드시 패하는가? 필시 죽이고 정벌한 사람이 많으므로 그 후손에게 상서롭지 못한 일이 닥치기 때문이다. 지금 왕리가 3대째 장군이다."라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왕리는 정말로 항우에게 패하여 포로가 되고 말았다.<ref>《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ref>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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