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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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원군 세력의 개입 ===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고, 청군과 일본군이 개입하자 대원군의 귀에는 농민들이 [[대원군]]을 부르짖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대원군은 밀사를 파견하여 농민군 지도부와 접촉했다.<ref>임용한, 《난세에 길을 찾다》(시공사, 2009) 306페이지</ref> [[1894년]] [[2월]] [[흥선대원군]]은 이들을 이용하기로 하고 교섭을 시도한다. 동학 남접의 주요 지도자의 한 사람인 [[전봉준]]이 한때 흥선대원군의 [[운현궁]] 식객이었던 점도 이들 양자 사이의 연결을 주선하는 역할을 하였다.
 
동학 교도들과 탐관오리에게 시달린 농민들 외에 양반 사대부와 지식인층이 가담하고, [[불교]] 승려들까지 가담했다는 사실을 접한 흥선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명성황후]]를 타도할 계획을 수립한다. 정치 문제에 휘말리기를 꺼려한 북접을 제외한 남접과 서포는 모두 부패한 탐관오리와 척신을 싸고 도는 왕비를 원수처럼 여겼으므로 대원군은 이들을 이용, 명성황후를 암살하고 [[이준용 (1870년)|이준용]]을 추대하기로 작심한다.
 
=== 개혁 운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