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동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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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의 일제 패망에 대한 확신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경성부]],[[도쿄]]에서 [[오가와 슈메이]],다나카,[[고노에 후미마로]] 등 일본 정계,군부 고관들과 접촉해 고급 정치,군사정보를 입수하는 한편, 중국 [[옌안]], [[베이징]],[[만주]]에 있던 이영선(李永善),[[최근우]] 등과 연락을 통해 국제정세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1940년대 국내에는 여러 가지 경로로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를 비롯한 단파방송을 청취하고 있었는데, [[여운형]]도 이 같은 정보에 접하고 있었다. 그는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인 [[1942년]] 4월부터 8월까지 두 차례 일본 [[도쿄]]를 방문하여 [[두리틀 공습|미군기의 최초 도쿄공습]]을 직접 목격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의 패망이 목전에 도래했음을 확신하게 되었고, 일제 패망에 대비할 활동을 계획하는 한편, '일제의 패망=조선의 독립'이라는 논리에 근거해 건국준비작업을 세웠다. 그러나 [[1942년]] 12월 [[도쿄]]에서 귀국하는 길에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치안유지법]]’,‘육해군형법’,‘조선임시보안령’ 위반혐의로 경성헌병대에 연행, 구속되었다. 이는 오건영(吳建永),이재형(李載馨),[[홍증식]](洪增植)에게 한 도쿄 목격담이 오견영의 아들 오성룡(吳成龍)을 통해 유포되었기 때문이었다. 여운형은 [[1943년]] [[7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고, 이때 약 반년간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조선건국동맹에 대한 구상은 이 기간에 구체화되었다. 이 같은 구상은 1930년대 중반부터 지속된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 관련자, 체육, 무술계 관련자, 진보적 청년, 학생층, 결혼식 주례인맥 등 지인들의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 졌다.
 
뒷날, 광복이후 발행된 [[1947년]]판 《조선연감》기록에 의하면 [[1943년]] [[8월 10일]]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민족해방연맹’이 결성되었고, 이듬해 [[1944년]] 8월에 조직, 정보연락,대책연구 등 3부문의 횡적 조직하에 조선건국동맹으로 발전,·강화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초기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