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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정보
파일:Heungchunsa.jpg▼
|사찰 이름 = 흥천사 <br />(興天寺)
'''서울 흥천사'''는, 한국의 사찰이다. 행정주소명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흥천사길29.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소속으로 [[조계사]]의 말사이다. ▼
|그림 크기 = 300px
|그림 설명 = 흥천사 대방
|건립 연대 = 조선 태조 6년([[1397년]])
|창건자 = 조선 태조
|종파 = [[조계종]]→[[화엄종]]→[[선종]]→[[대한불교조계종]]
|본존 = [[아미타여래]]
|별칭 = 신흥사(新興寺), 정릉사(貞陵寺)<ref>《중종실록》중종 5년 경오(1510년) 3월 28일조.</ref>
|문화재 = 흥천사 지장시왕도, 흥천사 시왕도, 흥천사 약사불도, 흥천사 목조보살좌상, 흥천사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판, 흥천사 천룡도, 흥천사 현왕도, 흥천사 목조여래좌상, 흥천사 도량장엄번, 흥천사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 흥천사 극락보전 도량신도, 흥천사 조왕도, 흥천사 만세루 신중도, 흥천사 만세루 제석천도, 흥천사 만세루 아미타불회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흥천사길29(돈암2동 595번지)
|지도 =
|띄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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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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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흥천사'''('''-- 興天寺''')는, 한국의 사찰이다. 행정주소명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흥천사길29.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소속으로 [[조계사]]의 말사이다.
== 연혁 ==
흥천사는 [[조선]] [[태조 이성계|태조]] 6년([[1397년]]) 창건되었다. 태조의 계비였던 [[신덕왕후 강씨|현비 강씨]]가 동왕 5년([[1396년]]) 가을 8월 무술에 사망하자 태조는
태조는 흥천사의 공역에 거동해 인부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가 하면 흥천사가 완공되지 않았을 때도 신덕왕후의 기일재와 천도재를 이곳에서 열고 자주 거동해 우란분회 등의 법회를 열었으며, 무인정사([[1차 왕자의 난]]) 이후 양위하고 난 뒤에도 흥천사의 공역을 마칠 것을
[[조선 세종|세종]] 3년([[1422년]])과 6년([[1424년]]) 흥천사에서 세종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축수재를 올리거나 이듬해 [[소헌왕후 심씨|공비]](恭妃)
신료들이나 유생들은 흥천사가 한양도성 안에 있으므로 이를 바깥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흥천사의 수리를 정지하거나 연기할 것을 청하였지만 세종은 흥천사가 태조와의 연고가 있는 사찰이며 태조의 자손으로써 태조가 보호를 명한 사찰을 퇴락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논리로 윤허하지 않았다. 세조 7년(1461년)에는 흥천사에 범종을 공양하였으며([[흥천사명 동종]]), 흥천사에서 지내기로 한 불공이 빠진 것에 대해 승정원을 통해 판사와 판관, 주부를 국문하도록 하였고, 동왕 13년(1467년) 모든 영선을 파하게 하면서도 한양도성의 수축과 경선전, 함원전 및 흥천사의 보수 공사만큼은 정지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조선 예종|예종]]과 [[조선 성종|성종]] 모두 전례대로 기우제와 기청제를 흥천사에서 올리고, 일본에서 오는 사신들을 접대하는 객관으로써 흥천사 공간을 활용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10년([[1504년]]) 흥천사는 사리전만 남기고 화재로 전소되었고, 사리전도 6년 뒤인 중종 5년([[1510년]]) 불타버렸다. 불타버린 흥천사는 한동안 공지로 남아 있었고, 중종이 흥천사 부지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사는 것을 허용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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