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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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월 16일]]자에서 '조선을 소련의 속국으로-상항 방송이 전하는 박헌영의 희망'이라는 기사와, '박헌영의 매국언동, [[한민당]]에서 배격을 결의'라는 기사를 싣고, 17일 크게 지면을 할애하여 '조공 박헌영씨 언동에 큰 파동, 전국적으로 배격운동, 각 정당과 50개 단체 분연 궐기'라고 보도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3 /> [[1월 18일]] [[동아일보]]는 이것을 가지고 다시 사설을 썼다. 반탁단체들은 [[동아일보]] 보도대로 박헌영 타도를 결의하였고, '매국적징치 긴급단체협의회'를 조직, 결성하였다. 박헌영은 곧 부인담화를 발표하였고, [[1월 5일]] 합동기자회견에 참석했던 외신 기자들이 박헌영의 주장이 옳다는 공동성명서를 냈다.<ref name=autogenerated13 /> 그러나 존스턴은 다시 자기 주장이 옳다고 말하였고, [[동아일보]]에서는 '뉴욕타임즈에 오보는 없다. 존스턴씨와 박헌영씨의 회담진상 경위'라는 제하로 기사를 보도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3 /> 이후 박헌영은 신탁통치에 찬성한 것처럼 알려져 왔고, 반탁단체들의 성토 대상이 되었다.
 
결국 찬탁론자에다가 친소파로 몰리게 된 박헌영은 [[1946년]] [[2월]]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섰다. 그가 찬탁으로 돌아선 배경에는 서울의 소련 부영사 [[아나톨리 샤브신샵신]]의 조종이 있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03100209107001&ed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10-31&officeId=00020&pageNo=7&printNo=23013&publishType=00010 김학준, 광복50주년 특집 해방공간의 주역 〈12〉 蘇(소) 부영사 샤브신 : 朴憲永(박헌영) 조종 신탁지지 이끌어] 1995.10.31. 동아일보 7면</ref> [[서울]]에서 그는 [[우익]]단체들의 테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신탁통치는 식민통치의 한 방식이며 이를 찬성하는 자는 반역자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고 믿은 우익 청년단원들은 찬탁으로 전환한 박헌영, [[여운형]]을 암살의 표적으로 삼았다.<ref>나영균,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 (황소자리, 2004) 224페이지</ref> [[김원봉]], [[허헌]]도 표적이 되었고, 그밖에 진영을 넘어 [[김규식]], [[안재홍]], [[배은희]], [[명제세]], [[장덕수]] 등도 암살의 표적이 되었다.
 
박헌영이 신탁통치에 대한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찬탁을 주장하자, [[한민당]]은 그가 본심을 드러낸 것이라며 비난, 공세를 가하였다.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암살 직후 테러와 암살의 위협을 느낀 그는 여러 곳에 거처를 마련하였고, 청년단체의 위협을 피해 그는 수시로 거처를 옮겨다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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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eoul-Deoksugung-10.jpg|섬네일|250px|왼쪽|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그는 한국의 독립에 있어서 열강 등 외세 강대국의 개입은 부득이한 현실임을 인정했고, 열강들과 외국의 동의를 구하고 정부 수립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1946년]]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정치활동을 하던 중, [[김일성]]의 북조선 권력 장악에 박헌영의 심기는 영 못마땅하였다. 박헌영은 [[김일성]]과 [[소련]] [[인민군|점령군]]이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배격하고, 김일성 빨치산 부대를 중심으로 [[한반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공산혁명]]을 추진함으로써 많은 잘못이 저질러지고 있다고 보았다.<ref name=autogenerated10>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82페이지</ref><ref name=autogenerated11>북한 50년사:떠안아야 할 반쪽의 우리 역사(김학준, 동아출판사, 1995) 111페이지</ref> 박헌영의 이런 비판은 스탈린에게까지 보고되었는데, 스탈린은 46년 7월 초 김일성과 박헌영을 극비리에 모스크바로 불러들였다.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가 비밀리에 비행기로 평양으로 와서 두 사람을 태워 모스크바로 데려갔다고 한다.<ref>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 상권 pp.326~327. 당시 평양의 소련군정은 서울에 있던 박헌영을 비밀리에 평양으로 데려갔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는 연해주군관구 사령관이었던 [[키릴 메레츠코프|메레츠코프(Kirill Meretskov, 1897-1968)]] 원수가 보로쉴로프(현 [[우수리스크]])에서 비밀리에 비행기로 평양으로 날아와 김일성과 박헌영을 태우고 모스크바로 갔다고 한다.</ref><ref>박병엽 구술, 유영구, 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선인, 2010) p.70 : 김일성과 박헌영의 4차 회동이 1946년 6월 27일~ 7월 12일경까지 평양과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때 박헌영과 김일성에 대한 스탈린의 면접 시험이 있었다.</ref> 두 사람을 만난 뒤 스탈린은 [[김일성]]을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최종 재가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0 /><ref name=autogenerated11 /> 스탈린은 45년 9월 초 [[제88국제여단 (소련)|88여단]]의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한 후 그를 지도자로 결정하였고,<ref>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 하권 pp.202~204 ;<br/>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아카데미, 2008) pp.72-73</ref> 이 결정을 바꿀 생각이 애초에 없었으므로, 두 사람을 모스크바로 불러 다시 면접한 것은 박헌영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소련 외무성 측은 박헌영을 북한 지도자로 밀었다고 하는데, 이는 박헌영과 자주 접촉하던 서울의 소련 부영사 [[아나톨리 샤브신샵신]]의 추천에 따른 것이라 한다.<ref>[http://news.joins.com/article/2683948 박헌영의 정치노선:상(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7)] 중앙일보 1992.02.06 종합 11면<br>[http://news.joins.com/article/2685191 박헌영의 정치노선:하/소의 「찬탁」지지에 겉으로만 따르는 척/남쪽 정세 불리하자 김일성 지지 선회“중위세력손잡고 사회주의로 통일”(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8)] 중앙일보 1992.02.10 종합 11면<br>[http://news.joins.com/article/2730188 박헌영 스탈린에 김일성 비판편지(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80)] 중앙일보 1992.07.23 종합 11면</ref> 그러나 소련 군부와 [[라브렌티 베리야]]가 수장인 [[내무인민위원회]](NKVD)가 민 김일성이 선택되었다.
 
[[2월]] 한반도에 총선거 시행을 위한 [[미국]], [[소련]] 등의 협력으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된다고 결정되자, 그는 미소공위의 불가피성을 인식하고 미소공위 활동에 찬성하였다. 그러나 미소공위 찬성이 알려지면서 그는 또한번 우익과 친일파들로부터 매국노로 몰려 심한 비판과 질타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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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이 [[김규식]]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그는 이승만과 김구의 정체를 대중 앞에 폭로한 것처럼 김규식의 정체도 폭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흥분하지 말고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고 지시하다.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그의 옳지 못한 결정들을 근거로 폭로해야 한다고 조언하다.</li></ul>
 
미군정이 기록한 주한미군사에 의하면 해방 전후 시기 서울의 소련 부영사였던 [[아나톨리 샤브신샵신]]은 박헌영이 자신의 심복(henchman)이라고 말하고 다녔다.<ref name="shab">[http://db.history.go.kr/id/husa_002r_0010_0020 주한미군사 2 > 2부. 1장. 한국의 정치와 사람들, 첫 6개월 > 2. 공산당] 국사편찬위원회</ref> 그는 철저히 소련에 종속된 사람이었다.
 
==== 제1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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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16%가 박헌영을 지목하였다.<ref name="이정식226">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26~228쪽 참조.</ref> 그 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때는 1957명 중에 한표도 받지 못하였다.<ref name="이정식226"/>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68표를 얻어 3위였다.<ref name="이정식226"/>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84표를 얻었다.<ref name="이정식226"/>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62표를 얻었다.<ref name="이정식226"/> [[1946년]] 당시 [[미군정]]은 [[사회주의]] 계열을 탄압하지 않을 경우 박헌영이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 될 우려가 있다는 보고를 하기도 했다.<ref group="주해">대표적으로 1946년 10월, 남로당 결성 이전이었던 조선공산당에서 주도한 [[대구 10.1사건]]이 터지기도 한 만큼 한동안은 공산당이 우세했었던 시각이 있었다. 실제로 미군정이 1946년 실시한 국민여론조사에 따르면 당시 국민 중 약 70%가 사회주의 계열 정당을 지지하고 있었다.</ref>
 
서울의 소련 부영사였던 [[아나톨리 샤브신샵신]]이 믿는 한국인 친구에게 자신이 조선공산당을 통제하고 있으며 박헌영은 자신의 심복부하(henchman)라는 사실을 밝혔다고 한다.<ref name="shab"/> 그가 소련의 지시를 받고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섰다든가, 수시로 [[스티코프]]에게 행동 지침을 내려줄 것을 요청한다든가, 스탈린의 북한지도자 결정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든가 하는 행보를 보면 철저히 소련의 의사에 종속된 사람으로, 공산주의자는 소련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이승만의 비판이 타당한 면이 있다.
 
=== 긍정적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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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증법]]
* [[이오시프 스탈린]]
* [[아나톨리 샤브신샵신]]
* [[니키타 흐루쇼프]]
* [[테렌티 스티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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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small>
* [[아나톨리 샤브신샵신|F. 샤브시나 꿀리꼬바(1906~1998)]], [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53323114 《(역사인물 회고) 소련의 여류 역사학자가 만난 박헌영》] 서울 : 역사비평사, 1994
* [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88675266 박헌영 선생 결혼 기념(앨범)]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1950) : 6.25 당시 미군 노획 문서
* [http://db.history.go.kr/id/fs_006_0020_0020 박헌영에 대한 평정서] 해외사료총서 6권 (국사편찬위원회, 2003년 12월 30일) : 러시아연방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 소련군정문서, 남조선 정세 보고서 1946~1947 > Ⅱ.러시아연방국방성 중앙문서보관소 문서군 172, 목록 614631, 문서철 17 > 2. 박헌영에 대한 평정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