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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학자입니다. 본인 논문을 올릴 수는 없으니 다른 문서처럼 넷상 출처를 쓴 것이지요. 눈을 좀 재대로 씻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쪽은 항상 그쪽이 쓰는 글은 유력하다 이러는데 역사학에 유력설이 있습니까? 단군과텡그리설은 유명한 학설인데 기타로 굳이 옴기는 것은 친중성향때문이 아닌지요? 의도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눈 씻고 봐도 이런 발언은 상대방에게 기분나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중국어 번역해서 옴기는 건은 사학이 아니고 번약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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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에 대한 인식 ==
단군은 [[고려]] 말, [[대몽항쟁]] 시기에 주목받기 시작하여 [[조선]]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국조(國祖)로 추앙되었다. [[조선 세종|세종]] 때에는 평양에 단군과 동명왕을 모신 사당을 지어 국가적으로 제사를 올렸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신주를 모신 삼성당(三聖堂) 또는 삼성사가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단군의 어원을 투르크 및 몽골 지역의 천신을 가리키는 Tangri로 보는 많은 학자들의 주장이 있다.<ref>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6&mcate=M1060&nNewsNumb=20141015793&nidx=15794</ref>
 
[[구한말]]에는 외세의 각축에 대항하는 [[한민족]]의 구심점으로 대폭 강조되어 [[대종교|단군교]](檀君敎)와 같은 종교로까지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민족주의의 구심점으로 부각된 단군은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운동의 정신적 토대로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대종교 및 독립운동 세력에 의해 단군 시대의 역사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부풀린 《[[대동사강]]》, 《규원사화》 등의 [[위서 (역사학)|위서]]들이 편찬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일제 혹은 친일파들이 단군을 종교적·학문적으로 이용하여 민심을 무마하려 하거나 [[일선동조론]] 등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악용하기도 하였다.<ref>삿사 미츠아키, 〈한말·일제시대 단군신앙운동의 전개 : 대종교·단군교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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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333년]]부터 [[기원전 238년]]까지 2096년간 지속되었다.
 
 
== 기타 ==
단군의 어원을 투르크 및 몽골 지역의 천신을 가리키는 Tangri로 보는 주장이 있다.<ref>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6&mcate=M1060&nNewsNumb=20141015793&nidx=15794</ref>
 
== 관련 문화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