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철 (1890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특정판 삭제 신청
태그: m 모바일 웹
12번째 줄:
 
1930년 4월 1일 전라북도 관선 도평의회원으로 임명되었으며 [[1930년]] [[6월 3일]]부터 [[1933년]] [[6월 2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1933년 2월에는 고창고등보통학교 전무를 역임했고 1933년 5월 11일과 [[1937년]] [[5월 11일]]에는 전라북도 관선 도회의원으로 임명되었다. [[1934년]] 9월에는 광주세무감독국 정읍세무서 소득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35년 10월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시정 25주년 기념표창과 은배 1조를 받았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중추원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이력 및 사회 활동
 
홍종철은 일제 강점기에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인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았고 1937년에는 370여 정보의 땅을 소유한 전라북도 고창군의 거부였다고 한다. [[1935년]] 7월에는 전라북도회의원 만주시찰단의 일원으로 만주를 방문했다. [[1936년]] 6월에는 정읍국자주식회사 이사를 역임했고 [[1939년]] 11월에는 고창요업주식회사 사장과 고창흥산주식회사 이사를 역임했다. [[1940년]] 2월에는 대흥광업주식회사 이사와 대흥상사주식회사 이사를, 1940년 12월에는 전라산업주식회사 이사를 역임했다. [[1941년]] 9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 전라북도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광복 이후인 [[1949년]] [[8월 6일]]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지만 같은 해 [[8월 31일]]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56년]]에는 홍해제염공사 사장을 역임했다.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 설립 과정에서는 300원을 기부했고 광복 이후에는 한성여자중학교 재단 설립 과정에서 약 165.29㎢의 토지를 기부했다.
== 이력 및 사회 활동 ==
홍종철은 일제 강점기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1937년 당시 370여 정보의 땅을 소유한 고창의 거부였다. 정읍국자(井邑麯子) 이사·고창요업주식회사 대표·고창흥산 이사·대흥광업 이사·대흥상사 이사·홍해제염공사 사장·고창연해어업조합 사장 등을 역임, 왕성한 경제활동을 하였다.
이외 고창 지역의 사회 활동에도 참여하였는데 1920년 고창청년회 회장·1921년 고창노동친목회 회장·1923년 『동아일보』 고창지국장·1927년 고창번영회 회장·1935년 소방조 설립 발기인 등을 지냈다. 특히 고창고등보통학교를 건립할 당시 16,000원을 기부하였고, 이사로 재임하면서 많은 기부금과 전답을 희사하였다. 또한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할 때도 당시 300원을 기부하였고, 해방 후 한성여자중학교 재단을 설립할 때는 약 165.29㎢[약 5천만 평]의 땅을 기부하였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579340&cid=51945&categoryId=55005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ref>
== 각주 ==
{{각주}}
 
== 참고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