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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현경]](顕慶) 5년([[660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조운에 실패하였다는 책임을 물어서 59세의 나이로 일개 병졸로 강등당했다. 이 해에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당군이 [[백제]]의 사비성(泗沘城)을 쳤고, 유인궤의 부하 [[유인원 (당나라)|유인원]](劉仁願)<ref>유인원과 유인궤는 이름이 비슷하지만 혈연관계는 없다.</ref>이 [[의자왕]](義慈王)을 잡는 공을 세웠다. 유인원은 소정방이 의자왕과 백제 왕족, 대신들을 포로로 데리고 돌아간 뒤에도 사비성에 남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용삭]](龍朔) 원년([[661년]]) 백제의 옛 신하 [[귀실복신]](鬼室福信) 등이 부흥운동을 일으켜, 사비성을 사면으로 포위해 유인원과 휘하 웅진도독부 당군은 고립되었다. 이 무렵 유인궤는 자신이 지원해 검교대방주자사(検校帯方州刺史)로 임명되어 원군으로 나섰다.
 
용삭 3년([[663년]]) 9월,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던 [[왜국]](일본)의 수군이가미쓰케누노 와카코(毛野稚子) 등 수군 2만 7천 명이 백강(白江)으로 나아가 당의 원병에 맞섰으나맞섰고, 8월에 양측은 백강 어귀에서 맞닥뜨렸다. 당은 네 번의 전투에서 400여 척의 왜군을 불사르고 주류성을 함락시켰다함락시켰으며, 부여풍은 고구려로 달아나고 백제의 왕자 [[부여충승|충승]](忠勝) 등은 신라에 항복하였다([[백강 전투]]). 백제 부흥군을 진압한 뒤 유인궤는 백제 옛 땅에 둔전(屯田)을 세우고 백제 유민들을 안무하기 위한 정책들을 폈다. [[인덕]](麟徳) 2년([[665년]]) [[당 고종|고종]](高宗)이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禅)을 행할 무렵, 유인궤는 신라 ・ 백제 ・ 탐라(耽羅) ・ 왜국 4개 국의 수령들을 거느리고 봉선에 참가하였고,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으며 우상(右相) 겸 검교태자좌중호(検校太子左中護)가 되고 낙성현남(楽城県男)에 봉해졌다.
 
[[총장 (당)|총장]](總章) 원년([[668년]])에는 웅진도안무대사(熊津道安撫大使) 겸 패강도총관(浿江道総管)이 되어 이적(李勣)을 따라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켰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禄大夫)에 임명되고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이 되었다. [[함형]](咸亨) 5년/[[상원 (당 고종)|상원]](上元) 원년([[674년]])에는 계림도대총관(鶏林道大総管)으로 임명되어 신라 공격을공격에 맡았다나서서([[나당전쟁]]) 이듬해 2월 호로하를 건너 신라 북쪽 변경의 칠중성(七重城)을 격파한 뒤에 돌아왔다. 이듬해에는이 해에 좌복야(左僕射)가 되어 조정에 참가하였다. 사성(嗣聖) 2년 1월 22일(685년 3월 2일) 문창좌상(文昌左相) 동봉각란대삼품(同鳳閣鸞台三品)으로써 재직하던 중에 사망하였다. 향년 84세였다. 사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병주대도독(并州大都督)에 추증되었고 사후 낙성문헌공(楽城文献公)에 봉해졌으며, 고종의 건릉(乾陵)에 배장되었다.
 
아들은 유도(劉滔)、유예(劉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