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학생 항일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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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eo Jong-suk.png|섬네일|200픽셀|[[허정숙]]<br />([[여성주의|여성 운동]]의 지도자)]]
 
[[1929년]] [[6월]] 광주 학생 운동이 터지자 [[허정숙]] 등은 [[경성]]에서 [[이화여자전문학교]],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등을 찾아다니며 [[광주]]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성추행했다며 동맹휴학과 시위를 홍보, 독려하였다. 또한 [[허정숙]] 등은 [[1930년]] [[1월 15일]] 경에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실천에 옮겼다. 이들 [[페미니스트]]들과 [[이화학당]], [[배화여전]] 출신 인사들은 경성 각급 학교의 대표들이 만나는 자리에도 특별히 참석하여 광주에서의 조선인 여학생의 성추행 사실을 알리고, 일본인들의 부당한 대우에 항거할 것을 역설하였으며 주변의 남학교 학생들과도 연대하여 휴학, 시위할 것을 부탁하였다.
 
[[허정숙]] 등은 적극적으로 나서 이화여전 외에도 동덕여대, 배화여전, 근화여자상업학교, 경성보육학교, 정신여학교, 실천여학교, 태화여자미술학교, 숙명여자고보 등의 여학생 수백 명이 이에 동조하여 거사를 계획하였다. 또한 여학생들을 통해 인근 남자 학교의 학생들에게도 만세 시위에 동참할 것을 독려, 호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