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도서집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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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서집성》이 조선에 들어오자 정조는 우선 책을 조선식으로 다시 장정을 하고, 규장각 검서관이던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서이수]](徐理修)에게 책의 목차를 베끼게 했는데 이 네 사람이 목차를 쓰는 데만 40일이 걸렸다고 하며, 목차가 완성되자 정조는 당대의 명필이던 조윤형(曺允亨)에게 책의 제명을, 사자관들에게는 부의 제목으로 쓸 글씨를 쓰게 했다.
 
서호수의 아버지로 규장각 설립을 주도했던 [[서명응]](徐命膺)은 세계지리서인 『위사』를 편찬하면서 이 책에 수록된 지리 정보를 인용했으며, [[정약용]](丁若鏞)은 [[1790년]] 무렵 화성을 건설하던 정조가 《고금도서집성》에 포함되어 있던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주면서 건설비용을 절감할 방안을 마련하라고 명했고 정약용은 《기기도설》에 나온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였다. [[이규경]](李圭景)은 서유구가 소장한 《기기도설》을 통해 이 책의 저자인 요한 테렌즈 슈렉이 기계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면서 쓴 알파벳 부호를 보았고,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이 문자를 소개하고 그 발음을 한자로 기입해 "이것만 익히면 온갖 소리를 기록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ref>[http://www.edasan.org/sub03/board03_list.html?bid=b32&page=56&ptype=view&idx=2070 (다산연구소) 18세기 지식정보의 보고(寶庫), 『고금도서집성』]</ref>
 
일본에서는 조선보다 훨씬 일찍 《고금도서집성》을 입수할 수 있었는데, 이 책이 완성 후 얼마 되지 않아 [[에도 막부]]의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에 의해서 전해진 초판 인쇄본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이 초판 인쇄본은 막부의 장서문고인 모미지야마 문고(紅葉山文庫)의 일부가 되었고, [[메이지 유신]] 후에는 신정부의 장서가 되었다가 [[메이지 천황]]에 의해 [[도쿄제국대학]]에 하사되었다. 그러나, [[관동 대지진]]으로 도서관이 불타면서 이 판본도 소실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