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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헤이]](正平) 21년/[[조지]](貞治) 5년([[1366년]]) 고려는 왜구 체포를 당시 쓰시마 도주였던 소 씨(宗氏)에게 요청하였고 소 쓰네시게(宗経茂)가 이에 응해서 고려와의 통교가 시작되었지만 왜구는 그뒤로도 여전히 창궐했고, 이러한 왜구의 창궐은 고려 왕조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고, 왜구 진압 과정에서 공을 세우고 명망을 얻게 된 신흥 무인 세력의 한 사람인 [[이성계]](李成桂)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를 세우게 되는 한 단초를 제공하였다.
 
해를 거듭하며 고려의 해안 전역을 휩쓸다시피 해서 고려의 지방 행정을 거의 초토화시켰던 왜구는 고려의 도통사 [[최영]]의 주도 아래 대대적인 수군 정비가 이루어지고 [[최무선]]의 건의로 설치된 [[화통도감]]를 통해 화약 무기가 도입되면서 고려 우왕 6년([[1380년]]) [[진포 해전]]에 이어 [[황산 대첩황산대첩]]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그 세가 위축되었다. 고려 우왕 9년([[1383년]]) 한반도 남해안의 관음포 앞바다에서 벌어진 [[관음포 전투 (고려)|관음포 전투]]에 이어 [[겐추]](元中) 6년/[[고오]](康応) 원년([[1389년]]) [[경상도]]원수(慶尚道元帥) [[박위]](朴葳)가 거느린 고려군이 당시 왜구 소굴로 지목되어 오던 쓰시마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쓰시마를 공격한 박위의 고려군은 왜구 전함 3백 척을 격파하고 포로가 되어 있던 다수의 고려인들을 구출하였는데, 이때 고려의 쓰시마 원정을 일본 역사에서는 고오의 외구(康応の外寇)라고 부르고 있다.
 
쓰시마에서는 왜구 금지나 조선과의 교역 진전에 적극적이었던 도주 [[소 사다시게]](宗貞茂)가 사망하고 왜구의 활동이 다시 활발해지게 되는데, 조선 [[조선 세종|세종]] 1년/[[오에이]](応永) 26년([[1419년]]) 5월, 조선의 충청도 비인현에 왜구가 출몰해 정박 중이던 조선측 병선을 불사르고 상륙해 읍성을 포위 공격하고, 민가를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며칠 뒤 황해도 해주 연평곶으로 와서 조선 수군에 중국으로 가는데 필요하니 식량을 대어달라는 요구를 하고는 쌀을 가져온 인부들을 억류하기도 하였다. 이에 당시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조선 태종|태종]](太宗)은 6월, 왜구 진압을 명분으로 내걸고 대대적인 쓰시마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때의 쓰시마 공격을 한국측에서는 '''기해동정(己亥東征)''', 일본측에서는 '''오에이의 외구(応永の外寇)'''라고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