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도서집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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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외로의 전래 ==
[[파일:Geojunggi.png|200px|섬네일|오른쪽|[[화성성역의궤]]에 실려 있는 거중기의 그림. 정약용이 거중기를 고안할 때 참조한 기기도설은 고금도서집성을 통해 입수된 것이었다. ]]
[[1781년]]에 [[규장각]]에는 총 3만 책의 서적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이는 《고금도서집성》 5천 책을 포함한 숫자였다. 이 책은 [[창덕궁]] 후원에 위치한 규장각 건물에 보관되어 이곳을 출입하는 사람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조선]]의 [[조선 정조|정조]]는 즉위한 직후에 사절을 청에 보내면서 부사 [[서호수]](徐浩修, 1736~1799)에게 특별히 당시 청 왕조에서 편찬중이던 《[[사고전서]]》(四庫全書)를 구입해 오라는 명을 내렸지만, 현지에 도착한 사절단은 당시 《사고전서》는 아직 인쇄가 완료되지 않았고 인쇄한 수량도 4건에 불과하여 구입하기가 어려움을 보고 방향을 바꾸어 《고금도서집성》을 당시 숙소를 출입하던 서반(序班)<ref>청나라 홍려시(鴻臚寺) 산하 사의(司儀) · 사빈서(司賓署) 소속 종9품 관리. 시반(侍班) · 제반 (齊班) · 규의(糾儀) · 전찬(傳贊)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연경에 온 조선의 연행사들은 청나라 관아의 역사에 종사하던 이들 서반을 통해서 연경의 사정을 전해듣거나 그들을 통해 서적, 서화 등속을 비싼 값에 수입하기도 하였다(이성혜 《한국 근대 서화의 생산과 유통》 해피북미디어, 2014년).</ref>들을 통해 구입했다. 그때 대금으로 은 2,150냥이라는 거금을 지불했다고 한다.<ref>홍한주(洪翰周)의 《지수염필》(智水拈筆)에는 조선에서 온 사신들이 《고금도서집성》을 수입할 당시, 연경의 서점가 사람들은 "이 책은 간행된 지 50년이 지났는데, 귀국은 문(文)을 숭상한다면서 이제야 사가는지요? 일본에서는 이미 나가사키에서 1부, 에도에서 2부 등 이미 3부를 구해 갔습니다"라며 비웃었다는비웃어 조선 사신들을 부끄럽게 했다는 일화를 싣고 있다. 다만 오타 오사무(太田修)의 연구에 따르면 에도 시대 일본에서도 《고금도서집성》은 [[1760년]]에 딱 한 부(1만 4권)밖에 수입하지 못했고, 그나마도 막부 도서관에 비장되어 일반인들은 물론 웬만한 학자들에게도 열람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김시덕, 《전쟁의 문헌학》 329~330쪽).</ref>
 
《고금도서집성》이 조선에 들어오자 정조는 우선 책을 조선식으로 다시 장정을 하고, 규장각 검서관이던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서이수]](徐理修)에게 책의 목차를 베끼게 했는데 이 네 사람이 목차를 쓰는 데만 40일이 걸렸다고 하며, 목차가 완성되자 정조는 당대의 명필이던 [[조윤형]](曺允亨)에게 책의 제명을, 사자관들에게는 부의 제목으로 쓸 글씨를 쓰게 했다. 고금도서집성은 정조 9년([[1785년]])까지도 이문원에 잠시 보관되어 있었으나, 이문원에 있는 동안 고금도서집성을 책을 전담해 관리할 사람이 없는 데다 필요한 사람이 보다가 아무렇게나 꽂아두는 것은 물론 분실의 위험까지 있었다. 규장각 관원들이 의례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고금도서집성을 활용하는 경우도 확인되지만, 홍한주(洪翰周)의 《지수염필》(智水拈筆)에 따르면 일반적인 경우 각신(규장각 관원)이라 해도 감히 대출을 청하기 어려웠고 각신이 아닌 경우에는 고금도서집성을 구경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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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수의 아버지로 규장각 설립을 주도했던 [[서명응]](徐命膺)은 세계지리서인 《위사》(緯史)를 편찬하면서 이 책에 수록된 지리 정보를 인용했으며, [[정약용]](丁若鏞)은 정조 20년([[1796년]]) 당시 화성을 건설하던 정조가 《고금도서집성》에 포함되어 있던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주면서 그 책의 핵심 내용을 연구해 수원화성의 건설비용을 절감할 방안을 마련하라고 명했고, 정약용은 《기기도설》에 나온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기중가도설》을 지어 올리면서 이 책 안에 들어 있던 도면을 화원에게 옮겨 그리게 하고는 배접해서 첩으로 만들었다. 농업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용도에서도 이 기구들을 잘 연구해 활용한다면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에서였다.<ref>배우성 《독서와 지식의 풍경: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읽기와 쓰기》돌베개, 2015년.</ref> [[이규경]](李圭景)은 서유구가 소장한 《기기도설》을 통해 이 책의 저자인 요한 테렌즈 슈렉이 기계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면서 쓴 알파벳 부호를 보았고,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이 문자를 소개하고 그 발음을 한자로 기입해 "이것만 익히면 온갖 소리를 기록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ref>[http://www.edasan.org/sub03/board03_list.html?bid=b32&page=56&ptype=view&idx=2070 (다산연구소) 18세기 지식정보의 보고(寶庫), 『고금도서집성』]</ref>
 
일본에서는 조선보다 훨씬 일찍 《고금도서집성》을 입수할 수 있었는데, 이 책이 완성 후 얼마 되지 않아않은 1760년 [[에도 막부]]의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에 의해서 전해진 초판 인쇄본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이 초판 인쇄본은 은화 25칸메로 구입되어 막부의 장서문고인 모미지야마 문고(紅葉山文庫)의 일부가 되었고, 이후 한 번 더 청의 상인이 가지고 와서 팔려고 했지만 가격을 5백 금으로 불러서 아무도 살 수 없었다고 한다. [[메이지 유신]] 후에는 신정부의 장서가 되었다가 [[메이지 천황]]에 의해 [[도쿄제국대학]]에 하사되었다. 그러나, [[관동 대지진]]으로 도서관이 불타면서 이 판본도 소실되고 말았다. 또한 일본측에서는 「고증」(考証) 24권 ・ 「목록」 40권 ・ 「분류목록」(分類目録, [[일본 문부성]] 편) 등의 참고도서류가 있어서 본서 이용에 활용하고 있다.
 
막부의 도서관인 모미지문고의 장서로써 일반인은 물론 웬만한 학자들도 《고금도서집성》을 접하지 못했기에 이 책의 내용을 둘러싸고 온갖 소문이 나돌았으며, 그 가운데는 [[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쓰네가 요리토모에게 쫓겨 히라이즈미로 달아났다가 그곳에서 자결한 것이 아니고 북쪽으로 달아나서 에조치(홋카이도)를 거쳐 대륙으로 달아났다는 이른바 요시쓰네 북행설(北行設)도 있었다. 이는 《고금도서집성》에 포함된 문헌 가운데 도서집감이라는 제목의 서적이 있고 청의 황제가 그 책에 몸소 붙인 서문에서 "짐의 일족은 원의경의 후예이다. 원의경은 청화에서 나왔으므로 국호를 청국이라 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는<ref>모리 나가미(森長見) 저 《국학망패》(国学忘貝, 1783년).</ref> 소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교토의 승려 [[다이텐 겐조]](大典顯常)의 《평우록》(萍遇錄)에 실려있는 조선 통신사 서장관 남옥(南玉)과의 문답에서도 다이텐 자신의 세숙 기무라 겐카도로부터 '이러한 사실(청 황실의 선조가 요시쓰네라는 것)이 고금도서집어성에 나온다고 하는데' 운운하면서 언급하고 남옥이 청 황실의 혈통은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결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후손이 아니라고 대답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