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마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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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섬은 과거 1개의 섬이었으나, 지협이 되고 있었던 부분에 운하를 팠다. [[간분]](寛文) 12년([[1672년]])에 오후나고시 세토(大船越瀬戸), [[1900년]](메이지 33년)에 만제키세토(万関瀬戸)가 개통되어 가늘고 길었던 섬은 남북 세 곳으로 분리되었다. 과거에는 남부를 가미시마(上島)、북부를 시모시마로 불렀으나, 오늘날에는 만제키세토 북부를 가미시마, 남부를 시모시마로 부르고 있다.
 
전체적으로 산이 매우 높은 편이며 특히 시모시마 방면에 표고가 높은 산이 많다. 시모시마 중앙부에는 최고봉 야타테 산(矢立山, 표고 648.40m{{refnest|group="*"|平成28年三角点標高成果の改定に伴う標高変更で649mから648mと1m低くなった。<ref>{{Cite web인용|url=http://www.gsi.go.jp/KOKUJYOHO/MOUNTAIN/koshin_naiyo.pdf|format=PDF|title=日本の主な山岳標高〔更新内容(平成21年度以降)はこちらをご覧下さい。〕|publisher=[[国土地理院]]|date=|accessdate=2016-05-11}}</ref>尚、山頂にある三等水準点の標高は648.40m<ref name="kijun">{{Cite web 인용|url=http://sokuseikagis1.gsi.go.jp/ |title=基準点成果等閲覧サービス |publisher=[[国土地理院]] |accessdate=2016-05-11|quote=基準点コード TR35129211801}}</ref>。}}) 등이 야타테 산줄기를 이루어 우치야마 분지(内山盆地)를 에워싸고 있다. 그 북동쪽으로 아리아케 산(有明山, 표고 558.09m<ref group="*">一等三角点 基準点名:有明山、基準点コード:TR15129224101</ref>)이 있고, 아소 만 남안에 시라타케(白嶽, 표고 518m)이 있다. 가미시마 최고봉은 북부에 위치한 미타케(御嶽, 표고 479m)이다.
 
섬 안의 분수계는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주요 6개 하천 가운데 사고가와(佐護川) ・ 니타가와(仁田川) ・ 미네가와(三根川) ・ 사쓰가와(佐須川) ・ 세가와(瀬川) 다섯 곳은 서쪽을 향해 흐른다. 동쪽으로 흐르는 가장 큰 하천으로 섬 안 유역 면적 5위에 해당하는 것이 슈시가와(舟志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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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선사시대 ===
{{Main본문|쓰시마 국#선사시대|쓰시마 국#고대}}
[[구석기 시대]]에 대륙과 이어져 있었던 쓰시마를 따라 인류가 일본열도를 통과했으며, 당시 인류가 통과했던 발자취가 쓰시마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오늘날까지 확인된 쓰시마 섬 안의 가장 오래된 선사 유적은 신석기 시대에 속하는 조몬 문화(縄文文化)의 것으로 이 시대에는 이미 대륙과 쓰시마가 단절되어 쓰시마가 섬으로써 고립되어 있었다. 대륙으로부터 온 [[나우만코끼리]] 등의 포유류 화석도 발견되지 않았다.<ref group="*">峰町歴史民俗資料館の展示物</ref>
 
조몬 시대의 미네 정(峰町) 사가 패총(佐賀貝塚)이나 가미아가타 정(上県町) 시타루 패총(志多留貝塚)에서는 외양성 물고기의 뼈가 발굴되었으며, 미네 정에서는 가이와(貝輪, 팔에 차던 장식품) 재료가, 오키나와(沖縄) 조개(이모가이イモガイ, 고우보라ゴウボラ 등속)와 홋카이도산 조개(유키노카사ユキノカサ 외)를 사용했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석기 재료는 규슈 사가 현(佐賀県) 이마리 시(伊万里市) 고시타케(腰岳)에서 난 흑요석이었다. 나아가 미네 정 깃타 패총(吉田貝塚)에서는 조몬 시대 후기의 야구식 토기(夜臼式土器), 야요이 시대(弥生時代) 전기의 판부(板付) 1식 토기 등이 출토되어 규슈 지방 북부와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었던 것이 판명되고 있다. 이들 석기 ・ 가이와, 토기는 미네 정 역사민족자료관(峰町歴史民俗資料館)이나 도요타마 정 향토관(豊玉町郷土館) 등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
 
북부 규슈에서는 이 무렵부터 벼농사가 시작되고 평야가 개발되어 갔지만 쓰시마에서는 하천이나 낮은 충적지에도 불구하고 산지가 대부분인 지형으로 논을 넓게 경작할 수 없었으므로 야요이 시대에 이르러서도 수렵이나 채집, 고기잡이 등의 생업이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벼를 수확하는 도구였던 반달돌칼은 출토되지 않고 있다(다만 대륙 계통의 간석기나 청동기, 철기 등의 금속 도구 등은 출토되고 있다). 야요이 시대 전기의 박래품(舶載品)인 유병식(有柄式) 돌칼이 다수 발견되는 한편으로 [[기타큐슈]](北九州)에서 제작된 나카히로도보코(中広銅矛) ・ 히로카타도보코(広形銅矛)도 많이 출토되고 있다.<ref name=gishi>岡崎(200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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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
고대부터 대륙과의 교류가 이어졌으며, 역사적으로는 [[한반도]]와 [[왜국]](倭国) ・ [[왜인]](倭人) ・ [[야마토 왕권|야마토]]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 (역사서)|삼국지]]》(三國志) [[위지 왜인전]](魏志倭人傳)에 왜의 일원으로써 등장하며 [[대방군]](帯方郡)에서 [[야마타이국]](邪馬台国)으로 가는 경로로써 「[[구야한국]]」(狗邪韓國, 한국의 [[경상남도]] [[김해시]])에 대한 기술에 이어 「바다 하나를 건너서 1천 리」 남쪽에 위치해 있다고 되어 있다. 쓰시마는 이 시점에서 왜국 즉 야마타이국에 복속된 30여 나라의 하나로 알려져 있었다. 여기서 쓰시마는 거주하는 지역이 절해고도로 토지는 산이 험하고 깊은 숲이 많아 그 길은 짐승이나 다닐 듯 좁고 1천여 호 정도의 집이 살고 있었는데 좋은 밭이 없어서 [[해산물]]을 캐어 먹고 살며 배를 타고 남북을 오가며 쌀을 사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다른 왜의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히코」(卑狗)라 불리는 대관(大官)과 「히나모리」(卑奴母離)라 불리는 부관에 의한 통치가 행해지고 있었다고 한다.
 
쓰시마 섬에서 [[고훈 시대]](古墳時代) 초기에 축조된 데이즈카 고분(出居塚古墳)은 [[전방후원분]]으로써 버들잎을 닮은 형태(有茎柳葉式)의 동제 화살촉과 철검 파편, 대롱옥 등이 출토되었다. 전방후원분은 3세기 일본 열도에서 생겨난 고분 형태로 출토된 버들잎을 닮은 형태의 동제 화살촉은 고식(古式) 기나이형 고분(畿内型古墳)의 전형적인 출토품 가운데 하나로, 이 시대 쓰시마의 수장이 야마토 왕권과 밀접한 관계에 있어 그 영향을 강력하게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수장급 무덤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큰 무덤은 쓰시마 시 미쓰시마 정(美津島町) 다카하마소네(高浜曽根) 바닷가에 집중분포하고 있다. 에베스노쿠마 고분(えべすのくま古墳)은 전방후원분으로 보기도 하지만 전방후방분(前方後方墳)일 가능성도 있는데, 봉분의 전체 길이는 약 40m이다. 상자 형태의 관으로 동제 화살촉 12점, 대롱옥 1점, 철검이 출토되었고 동제 화살촉은 [[교토 부]](京都府) 묘켄 산 고분(妙見山古墳)나 [[후쿠오카 현]](福岡県)의 이시즈카야마 고분(石塚山古墳)의 것과 유사하고 고훈 시대 전기(4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쓰시마 정의 게치네소(鶏知ネソ) 1호분은 전체 길이 30m로 상자 형태의 관 뿐 아니라 대롱옥과 철제 화살촉, 외날칼이 출토되었다. 게치네소 2호분은 전체 길이 36m로 주실은 상자식 관뿐 아니라 [[스에키]](須恵器)나 철제 외날칼이 출토되었으며, 부실에서는 상자식 관에서 [[하제키]](土師器)와 철검이 출토되었다. 두 무덤 모두 돌무지무덤(적석총)이다.<ref name=gishi/>
 
[[파일:Grave of Onono Imoko1.jpg|섬네일|오른쪽|[[607년]] 중국의 [[수나라|수]](隋) 왕조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왜국의 사신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의 무덤. 오노노 이모코는 사신으로 파견될 때 그리고 돌아올 때 모두 쓰시마를 거쳐 귀국하였다. 오늘날의 일본 오사카 부(大阪府) 미나미가와치 군(南河内郡) 타이시 정(太子町) 소재.]]
쓰시마 섬의 수장으로써 《[[선대구사본기]]》(先代旧事本紀) 「구니노미야쓰코 본기」(国造本紀)에는 「쓰시마노 아가타노 아타이」(津島県直)로 전하고 있다. 고훈 시대는 야마토 왕권이 한반도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거나 혹은 한반도 국가들 사이의 전쟁에 개입, 혹은 한반도 국가에 대한 군사행동을 시도하면서 한반도와의 관계가 여러 각도에서 진전되던 시대로, 수식이 가해진 《일본서기》를 제외하고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 《[[송서]]》(宋書) 왜국전, 《[[삼국사기]]》(三国史記)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쓰시마가 구체적인 지명으로써 등장하는 것은 《일본서기》에서의 일로, 신화적인 진구 황후(神功皇后)의 삼한 정벌 당시 쓰시마 북단에 위치한 와니노쓰(和珥津, 오늘날의 가미쓰시마 정上対馬町 소재 와니우라鰐浦)에서 출항하였으며 돌아오는 길에 여덟 개의 깃발을 와다쓰미 신사(和多都美神社, 오늘날의 쓰시마 가이진 신사海神神社)에 봉납하였다는 것이다<ref>가이진 신사는 쓰시마 국의 이치노미야(一宮)로 지정되었다.</ref>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 이사금]](実聖尼師今) 7년([[408년]])조에는 왜인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해서 쓰시마 섬 안에 군영을 설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쓰시마는 야마토 왕권이 한반도로 가는 중계지로써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이후 왜국에 [[율령제]](律令制)가 시행되고 쓰시마는 [[사이카이도]](西海道)에 속한 령제국(令制国)으로써 [[쓰시마 국]](対馬国)으로써 오늘날의 이즈하라(厳原)에 고쿠후(国府)가 설치되었고, 지쿠시도독부 즉 [[다자이후]](大宰府)가 설치된 뒤에는 관할 안에 들게 되었다.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8년([[600년]])과 15년([[607년]]) 견수사(遣隋使)로 수에 파견된 오노노 이모코, [[조메이 천황|조메이]](舒明) 2년([[630년]]) 이누가미노 미타스키(犬上御田鍬)를 비롯한 초기 [[견당사]](遣唐使)들도 모두 [[이키 섬]]과 쓰시마를 그들의 기항지로 삼았다.
 
==== 백강구 전투와 쓰시마 ====
[[덴지 천황|덴지]](天智) 2년([[663년]]) [[백강구 전투]] 이후 왜국은 [[당나라|당]](唐) ・ 신라의 침공에 대비해 이듬해 쓰시마에 [[사키모리]](防人)를 배치하고 여덟 곳의 [[봉화|도부히]](烽火)를 배치하였다. 사키모리들은 대부분 [[도고쿠]](東国) 지역으로부터 징발된 자들이었고, 《[[만요슈]]》(万葉集)에는 고향을 떠나와 쓰시마에서 수자리 서면서 고향과 처자를 그리면서 읊은, 혹은 사키모리들의 아내와 자식들이 남편과 어버이를 그리면서 읊은 여러 편의 사키모리노우타(防人歌)가 등장하고 있다. 덴지 6년([[667년]])에는 아소 만 남안에 [[가네다 성]](金田城)을 쌓아 국경 요새로써 [[덴무 천황|덴무]](天武) 3년인 [[하쿠호]](白鳳) 2년([[674년]])에 이즈하라가 정식으로 쓰시마 고쿠후로써 정해졌으며, 같은 해 쓰시마노카미(対馬守) 오시미노미야쓰코 오오쿠니(忍海造大国)가 쓰시마에서 산출된 [[은]]을 조정에 헌상하는데, 이것이 일본 역사상 최초의 은 산출이었다. 이 쓰시마 은산(対馬銀山)은 은을 함유한 [[방연석|방연광]] 광상(鉱床) 으로 광석을 산 위로 옮겨서 며칠 동안 달이기를 계속하는 방식으로 남은 은을 채취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금속정련법은 [[회취법]](cuppelation)과 유사하였다.
 
[[몬무 천황|몬무]](文武) 5년([[701년]]) 쓰시마에서 산출되었다고 칭하는 [[금]]이 조정에 헌상되었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서 일본 조정은 연호까지 새로이 「[[다이호]]」(大宝)로 바꾸었을 정도였다(하지만 이는 오늘날에는 쓰시마에서의 금 산출이 위조된 것이었다고 판명되어 있다).
 
쓰시마 국에는 이나, 구스(久須) 등 다섯 개의 향(郷)을 묶어 가미아가타 군(上県郡), 쓰쓰(豆酘), 게치(鶏知) 등 다섯 개의 향을 묶어 시모아가타 군(下県郡)이 세워졌다. [[덴표]](天平) 13년(741년) 「진호국가」(鎮護国家)를 목표로 하던 [[쇼무 천황]](聖武天皇)이 고쿠분지(国分寺) 건립을 명하는 조(詔)를 내면서 쓰시마에서도 이즈하라 땅에 고쿠분지(国分寺)가 세워졌다.
 
사키모리 제도는 3년 교대로 도고쿠에서 파견된 병사 2천여 명에 의해 성립되고 유지되었으나 덴표 9년([[737년]]) 이를 정지시키고 규슈 본토의 지쿠시 국(筑紫国) 주민들을 쓰시마와 이키로 파견하는 것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도고쿠 지역에서 사키비토를 징발하는 제도가 부활하고, [[덴표호지]](天平宝字) 원년(757년)에는 이것도 폐지되어 사이카이도 도내 7개 구니([[지쿠젠 국]] ・ [[지쿠고 국]] ・ [[히젠 국]] ・ [[히고 국]] ・ [[부젠 국]] ・ [[분고 국]] ・ [[휴가 국]]) 병사 1천 명으로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ref name=kenshi43>新川(1998)pp.43–4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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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신라사 ====
고대에 신라에서 일본으로 [[긴메이 천황]](欽明天皇) 원년([[540년]])부터 [[엔초]](延長) 7년([[929년]]에 걸쳐 아흔 번에 가까운 사신들이 왔으며, 일본에서도 긴메이 32년([[571년]])부터 [[간교]](元慶) 6년([[882년]])까지 공식적으로만 45회에 달하는 사절이 파견되었다. 이들 사신들은 모두 쓰시마를 경유하였다. 쓰시마를 거쳐 신라로 파견되는 견신라사들의 와카는 [[8세기]] 중엽에 성립된 [[와카]](和歌) 모음집 《[[만요슈]]》(万葉集)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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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요슈》에는 이밖에도 「아소노우라」(浅茅浦)나 「다케시키노우라」(竹敷の浦) 등의 쓰시마 관련 지명이 보이며, 「다마쓰키」(玉槻)라는 쓰시마에 머무르던 여인<ref group="*">아레(阿連, 이즈하라 정)의 우네메, 다마쓰키(玉調, 미쓰시마 정)에서 태어난 [[유녀]](遊女)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ref>이 지은 노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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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는 노래도 수록되어 있다.
 
==== 신라구와 도이의 입구 ====
[[간무 천황]](桓武天皇) 때에 이르러 사키모리 제도는 일본 본토에서 폐지되었고 군단제(軍団制)로 바뀌었는데, 쓰시마와 이키 두 구니에 한해서만은 예외적으로 사키모리 제도가 존속해 있었다.<ref name=kenshi43/> 9세기부터 신라구(한구)라 불리는 신라 해적들이 규슈 연안과 세토 내해를 급습해 관물을 약탈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고닌]](弘仁) 4년([[813년]])에 있었던 신라 해적의 쓰시마 침공은 고닌의 간구(弘仁の韓寇)라 불리며, 이 침공 직후 쓰시마에서는 다자이후를 통해 조정에 신라어 통역과 함께 노사(弩師)를 배치할 것을 요청하였다. [[조와]](承和) 4년([[837년]])에는 일본 조정으로부터 와다쓰미 신사에 신위(神位)가 내려지기도 했다.
 
[[간표]](寛平) 6년([[894년]]) 신라 적선 대소 합쳐 1백 척에 탄 2,500명의 신라해적들이 쓰시마의 사쓰우라(佐須浦)를 습격하였고, 당시의 쓰시마노카미였던 훈야노 요시토모가 노사들을 동원해 이들을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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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쇼-주에이의 난]](治承・寿永の乱) 당시 쓰시마 고쿠시(国司)였던 후지와라노 지카미쓰(藤原親光)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외척이었기 때문에 겐지에 마음이 기울어 [[주에이]](寿永) 2년([[1183년]]) 쓰시마를 떠나 교토로 향하려 했으나 헤이케가 규슈 전역을 제압하고 있었으므로 쓰시마를 출발할 수도 없었다. 헤이케의 무장 다이라노 토모모리(平知盛)는 다자이노쇼니(大宰少弐)를 맡고 있던 하라다 다네나오(原田種直)를 통해 사이카이도 지역 무사들에게 [[야시마]](屋島)로 와서 헤이케에 합류할 것을 명하였지만, 지카미쓰는 이를 거부했고 세 번에 걸쳐 헤이케의 추토를 당하였다. 지카미쓰의 주종은 이에 고려로 달아났고, 헤이케가 멸망한 뒤인 분지(文治) 원년([[1185년]]) 6월에 쓰시마로 돌아왔다.<ref>佐伯(1998)p.77</ref>
 
중세 일본의 쓰시마는 장원 제도(荘園制度)의 발전이 보이지 않는데<ref name=miyamoto>宮本常一(1978)pp.162–164</ref>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는 각 구니마다 [[슈고]](守護)를 배치하면서 쓰시마 국의 슈고는 [[쇼니 씨]](少弐氏, 무토 씨武藤氏)에게 맡겼다.
 
[[12세기]]에는 훗날 [[소 씨]](宗氏)의 시조가 되는 고레무네 씨(惟宗氏)가 쓰시마에 들어 왔다. 고레무네 씨는 원래 다자이후의 관인이었는데 지쿠젠 국(筑前国)의 무나가타 군(宗像郡)에서 쓰시마로 왔다고 한다. 사료에서 고레무네 씨의 이름이 쓰시마의 재청관인으로써 확인되는 최초의 사례는 겐큐(建久) 7년([[1196년]])의 것이다. 고레무네 씨(소 씨)는 쇼니 씨의 슈고다이(守護代)로써 차츰 쓰시마에서 세력을 키워나갔고 [[무사]](武士)화되었다. 기존에 쓰시마에서 세력을 지니고 있었던 [[아비루 씨]](阿比留氏)는 당시 일본과 공식적인 국교를 맺고 있지 않았던(상인이나 민간교류는 행해졌다) 고려와의 교역을 행하고 있었고, 다자이후의 힐문도 따르지 않았다. [[간겐]](寛元) 4년([[1246년]]) 다자이후의 명으로 고레무네노 시게히사(惟宗重尚)가 게치 땅을 중심으로 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던 아비루 재청(阿比留在庁, 헤이타로平太郎)를 쳐서 쓰시마의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한편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에는 [[분에이]](文永) 2년([[1265년]]) 성립된 《속고금화가집》(続古今和歌集)에 수록된 다이나곤 도시미쓰(大納言俊光)의 딸이 읊은 노래가 실려 있다.
 
{{quo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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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나라의 일본원정 ====
가마쿠라 시대 일본은 두 차례에 걸친 [[원나라|원]](元, [[몽골 제국]])과 고려의 침공을 당했다. 이를 일본 역사에서는 원구(元寇)라고 부르고 있다. 당시 남송을 정벌하기 위한 외교적 방책으로 고려 출신의 조이로부터 남송과 통교하고 있는 일본을 초유해야 한다는 건의를 들은 [[쿠빌라이 칸]](원 세조)은 고려에 일본으로 가는 길 안내와 원과 일본의 통교 알선을 요구하였고, 30년에 걸친 대몽항쟁에 이어 몽골과의 화의를 반대하던 [[삼별초]] 세력의 반발을 진압하느라 국력을 거의 소진한 상태였던 고려 조정으로써는 원이 일본을 공격하게 될 경우 고려가 그 중간 거점으로써 피해를 입게 될 것을 염려하며 일본으로 가려는 몽골의 관리에게 바닷길의 험함을 일부러 강조하며 길 안내를 회피하거나 일찍이 일본이 고려는 물론 중국과도 공식적으로 통교한 적이 없고 일본을 공격해봐야 도움이 될 것이 전혀 없다며 원의 일본으로 가고자 하는 시도를 막으려 하였으나, 쿠빌라이 칸의 독촉과 고려 출신의 부원(附元) 반역자 [[홍다구]]의 횡포에 고려 조정은 결국 일본원정에 협조하게 된다.
 
쓰시마는 이 침공의 최초 공격 목표였고, 이때의 침공은 쓰시마 역사상 최대의 수난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분에이(文永) 11년([[1274년]]) 몽골 ・ 한인(漢人) 병사 25,000명과 고려 병사 8,000명 및 수부(水夫) 6,700명이 고려에서 건조한 함선 9백 척에 나누어 타고 10월 5일 쓰시마의 사쓰우라 ・ 고모다하마(小茂田浜)에 상륙하였다. 당시 쓰시마 섬을 지키고 있던 소 스케쿠니(宗助国)는 일족 노토(郎党) 80여 기(騎)를 거느리고 맞아 싸웠으나, 압도적인 병력과 전략전술 앞에 단 두 시간만에 전멸하였다. 이때의 수난을 고모다하마 신사(小茂田浜神社)에 전하고 있다. [[니치렌]](日蓮)은 자신이 쓴 편지에서 쓰시마에 상륙한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이 섬의 남자들을 살해하고 여자들은 손을 꿰어서 가죽끈으로 묶고 뱃전에 매달아두었다는 풍문을 전하고 있다. 이것이 쓰시마가 겪은 몽골 침공이었으며, 이키에서도 비슷한 참상이 벌어졌다고 한다.
 
[[고안]](弘安) 4년([[1281년]]) 원은 다시금 고려를 내세워 일본을 침공하였는데, 합포(合浦, 오늘날의 [[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출발한 몽골 ・ 한인 병사 3만 명과 고려 병사 9,960명, 수부 등 17,029으로 구성된 동로군(東路軍), [[닝보]](寧波)에서 출항한 옛 [[남송]](南宋) 출신의 병사들이 주력이 된 10만 명의 강남군(江南軍)이 일본을 공격하였다. 《하치만구도기》(八幡愚童記) 조오본(正応本)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quotation|其中に高麗の兵船四五百艘、壱岐対馬より上りて。見かくる者を打ころしらうせきす、国民ささへかねて、妻子を引具し深山に逃かくれにけり、さるに赤子の泣こえを聞つけて、捜りもとめて捕けり。</br>그 가운데 고려 병선이 4, 5백 척이라 이키 쓰시마에 상륙해 보이는 사람마다 쳐죽이니, 백성들이 갈 곳이 없어 처자를 이끌고 깊은 산으로 도망가 버렸는데, 이어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서 발각되어 붙잡혔다.}}
 
==== 왜구의 소굴 ====
원나라의 일본원정 이후 고려 말기에 이르러 중국과 한반도 해안에 [[왜구]](倭寇)라 불리는 일본발 해적들이 창궐하기 시작하였다. 쓰시마는 이키나 마쓰라와 함께 왜구의 근거지인 '삼도(三島)' 가운데 하나로써 지목되었다. 일본 학계에서는 왜구의 창궐에 대해 원나라의 일본원정에 대한 방위나 보복의 의미가 있었다고 해석하는 설도 존재하며<ref name=rekishi>[http://www.tsushima-net.org/history/index.php 対馬の歴史] - 対馬観光物産協会</ref> 한국 학계에서는 이영 등의 학자들에 의해 일본에서 [[난보쿠초 시대|남북조 시대]]가 열리고 남조와 북조 세력이 충돌하던 규슈 지역에서 지휘 계통의 혼선이 벌어진 와중에 [[아시카가 다카우지]] 타도를 외치며 규슈로 내려온 [[아시카가 다다후유]]의 공세에 몰린 [[쇼니 요리히사]]가 휘하에 거느리고 있던 쓰시마 소 가문을 통해 병량 확보를 위한 외부로의 약탈을 명한 것이 왜구 창궐의 시발점이 된 이른바 '경인년(1350년) 왜구'의 원인이었다고 하는 주장도 대두하였다.
 
[[쇼헤이]](正平) 21년/[[조지]](貞治) 5년([[1366년]]) 고려는 왜구 체포를 당시 쓰시마 도주였던 소 씨(宗氏)에게 요청하였고 소 쓰네시게(宗経茂)가 이에 응해서 고려와의 통교가 시작되었지만 왜구는 그뒤로도 여전히 창궐했고, 이러한 왜구의 창궐은 고려 왕조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고, 왜구 진압 과정에서 공을 세우고 명망을 얻게 된 신흥 무인 세력의 한 사람인 [[이성계]](李成桂)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를 세우게 되는 한 단초를 제공하였다.
 
해를 거듭하며 고려의 해안 전역을 휩쓸다시피 해서 고려의 지방 행정을 거의 초토화시켰던 왜구는 고려의 도통사 [[최영]]의 주도 아래 대대적인 수군 정비가 이루어지고 [[최무선]]의 건의로 설치된 [[화통도감]]를 통해 화약 무기가 도입되면서 고려 우왕 6년([[1380년]]) [[진포 해전]]에 이어 [[황산대첩]]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그 세가 위축되었다. 고려 우왕 9년([[1383년]]) 한반도 남해안의 관음포 앞바다에서 벌어진 [[관음포 전투 (고려)|관음포 전투]]에 이어 [[겐추]](元中) 6년/[[고오]](康応) 원년([[1389년]]) [[경상도]]원수(慶尚道元帥) [[박위]](朴葳)가 거느린 고려군이 당시 왜구 소굴로 지목되어 오던 쓰시마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쓰시마를 공격한 박위의 고려군은 왜구 전함 3백 척을 격파하고 포로가 되어 있던 다수의 고려인들을 구출하였는데, 이때 고려의 쓰시마 원정을 일본 역사에서는 고오의 외구(康応の外寇)라고 부르고 있다.
 
쓰시마에서는 왜구 금지나 조선과의 교역 진전에 적극적이었던 도주 [[소 사다시게]](宗貞茂)가 사망하고 왜구의 활동이 다시 활발해지게 되는데, 조선 [[조선 세종|세종]] 1년/[[오에이]](応永) 26년([[1419년]]) 5월, 조선의 충청도 비인현에 왜구가 출몰해 정박 중이던 조선측 병선을 불사르고 상륙해 읍성을 포위 공격하고, 민가를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며칠 뒤 황해도 해주 연평곶으로 와서 조선 수군에 중국으로 가는데 필요하니 식량을 대어달라는 요구를 하고는 쌀을 가져온 인부들을 억류하기도 하였다. 이에 당시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조선 태종|태종]](太宗)은 6월, 왜구 진압을 명분으로 내걸고 대대적인 쓰시마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때의 쓰시마 공격을 한국측에서는 '''기해동정(己亥東征)''', 일본측에서는 '''오에이의 외구(応永の外寇)'''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군은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를 총지휘관으로 병선 227척과 병사 17,285명이 삼군으로 편성되어 쓰시마를 공격, 오사키우라(尾崎浦)를 불사르고 이어 오후나고시(小船越)를 쳤으며, 나아가 仁位浦로 진군해서 누카다케(如加岳, 糠嶽라고도 쓴다)에서 쓰시마 병사들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누카다케에서 조선군은 쓰시마 현지 지형에 밝았던 쓰시마측 복병의 반격으로 대패했고, 180명의 병사가 죽었다. 교착 상태에서 마침 폭풍우까지 가까워왔고, 쓰시마측도 조선측과의 더 이상의 싸움이 어렵다는 판단에 조선측에 화평을 제안하면서 조선측이 이를 받아들여 7월 3일에 [[거제도]](巨済島)로 전면 철수하였다. [[에이호]](永享) 5년([[1433년]]) 소 씨의 주군이었던 쇼니 가문의 쇼니 요시요리(少弐嘉頼)가 [[스오 국|스오]](周防)의 [[오우치 씨]](大内氏)에게 패해 쓰시마로 도망쳐 와서 미네(三根)의 나카무라(中村)에서 거주하였다. 이로 인해 쇼니 씨와 소 씨는 나란히 지쿠젠에서의 세력 기반을 잃었다.
 
한편 조선 태종이 승하한 뒤 세종은 일본에 대한 선린정책을 행했고, 세 번에 걸쳐 [[조선통신사|통신사]](通信使)를 보내 통교 제도를 정비하였다. 에이호 10년([[1438년]]) 무렵 문인제(文引制)를 채용하고 가키쓰(嘉吉) 3년([[1443년]])에는 계해약조라 불리는 양국간 협약이 체결되어, 쓰시마에서 조선으로 오는 세견선(歳遣船)은 해마다 50척을 상한으로 하는 대신 조선측이 해마다 세사미(歳賜米)라는 이름으로 쓰시마 도주에게 2백 섬씩의 쌀을 지급하기로 결정되었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도항하는 자는 쓰시마 소 씨의 통제 아래 두게 하였고, 남부 해역에서의 고기잡이 특권도 소 씨에게 일부 허용하였다. 이 무렵의 쓰시마의 상황은 당시 통신사로써 일본을 방문했던 인물인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国紀)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렇게 조선과의 통교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권익들이 소 씨에게로 집중되는 과정은 동시에 쓰시마 섬 안에서의 소 씨의 령국 지배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ref name=tbs/> 섬 안의 호족들도 경제적 기반은 토지로부터 나오는 수입보다도 고역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소 씨가 조선으로부터 우대받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도 좋은 일이었다. 소 씨가 장악한 대조선 교역권과 어업권은 자신의 가신단 편성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ref name=tbs/>
 
[[에이쇼]](永正) 7년([[1510년]]) 조선측의 교역 억제 정책이나 항거왜(恒居倭)라 불리는 당시 조선 국내에 체류하던 일본인들에 대한 제재를 견디지 못하고 항거왜와 소 씨는 [[부산포]](富山浦), [[내이포]](乃而浦), [[염포]](塩浦)에서 병란을 일으켰는데, 쓰시마 도주의 아들인 소 모리히로(宗盛弘)를 대장으로 하는 4천에서 5천 명 정도의 군세가 조선측을 상대로 싸움을 벌였지만 수적으로 우세였던 조선측에 대패하고 모리히로는 [[진해구|웅천]](熊川)에서 죽었다. 이것이 「[[삼포왜란]]」이며, 이후 [[동중국해]]나 한반도 [[서해]]에 걸쳐 왜구가 다시 창궐하게 되었는데, 다만 이때의 왜구는 조선 바닷가가 아닌 명의 해안을 주로 타겟으로 삼았으며, 왕직(王直)과 서해(徐海), 이광두(李光頭) 등 중국 강남 지역 출신이 이끄는 경우도 있었다. 16세기에 창궐했던 이들 왜구는 14세기 여말선초의 왜구([[전기 왜구]])와 구분해 [[후기 왜구]]라 부르고 있다. 이들의 활동으로 조선과 일본간의 교역은 쇠퇴하였으며, 한편 소 씨는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 들어 이키로 진출한 마쓰라 씨(松浦氏)와 대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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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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