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당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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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4년]]에서 [[666년]] 사이, [[보장왕]] 23년 ~ 25년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맏아들 [[연남생]](淵男生)이 부친을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었다. [[연남생]]은 아버지 [[연개소문]]의 대를 이어 대권을 장악한 뒤, 지방의 여러 성을 순시하였다. 이 틈을 타 동생 2남 [[연남산]](淵男産)·3남 [[연남건]](淵男建)이 정변을 일으켜 수도를 장악하였다. 이후 형 연남생의 아들 [[연헌충]](淵獻忠)을 죽이고 왕명을 빌려 소환하자, [[연남생]]은 [[국내성]](國內城)으로 달아났다. 그 곳 세력을 규합해 고구려 중앙정부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먼저 [[오골성]](烏骨城)을 치는 한편 당나라에 대형(大兄) [[불덕]](弗德)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려 하였으나 요동을 통과하지 못하였다. 고구려 평양 중앙정부의 압력이 가해지자, [[연남생]]은 남으로 내려가 고구려 수도 평양을 치는 대신 서북 요동방면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연남생]]은 또다시 대형 [[염유 (고구려)|염유]](冉有)를 다시 당나라에 보내 구원을 청하였으나 회답이 없자, 이번에는 아들 [[연헌성]](獻誠)을 당나라에 보내어 거듭 구원을 청하였다.
666년 6월, 마침내 [[당 고종]]이 좌효위 대장군 [[계필하력]](契苾何力)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연남생을 맞이하게 하였다. 연남생은 이에 [[고질]], [[고현]], 책성도독 [[이타인]], [[고족유]] 등 국내성의 귀족들 및 부하들을 데리고 탈출하여 당 나라로 도주하였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666년 8월, [[보장왕]]이 연남건을 대막리지로 삼아 내외의 군사에 대한 직무를 겸직하도록 하였다. 666년 12월, 고구려가 형제간 내부 권력투쟁이 발생하는 동안 [[연개소문]]의 동생이자, [[연남생]]·[[연남건]] 형제의 숙부인 고구려의 대신 [[연정토]](淵淨土)가 고구려 남쪽의 12성, 763호, 3,543명을 데리고 신라에 투항 해 버렸다. 북쪽에서는 [[연남생]]이 당에게, 남쪽에서는 [[연정토]]가 신라에게 각각 투항하여 고구려 심각한 내부 분열로 위기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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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전쟁으로 국토 전역이 시달린 고구려는 이미 북쪽과 남쪽 곳곳의 여러 성에서 도망하고 항복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계필하력]](契苾何力)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밖에 도착하고, [[이세적]]의 휘하의 당의 대군이 도착했으며 이 때 [[연남생]]이 이끄는 당에 투항한 고구려 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곧이어 신라 군도 합류하여 당나라, 신라의 연합군은 한 달이 넘도록 평양을 포위하였다. 마침내 [[보장왕]]은 [[연남산]]으로 하여금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가 백기를 들고 이 적에게 항복하게 하였다. [[이세적]]은 예를 갖추어 접대하였다.
하지만 항복하려는 보장왕과 달리 대막리지 연남건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으며 성문을 닫고 수비하며 대항하였다. [[연남건]]은 자주 군사를 성 밖으로 출동시켜 싸웠으나 그 때 마다 패배하였다. 연남건은 승려 [[신성 (승려)|신성]](信誠)에게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신성은 소장 [[오사]]·[[고요묘]]
== 고구려의 멸망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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