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마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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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쇼]](天正) 15년([[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규슈 정벌]]에 즈음해 소 씨는 사전에 [[도요토미 정권]에 신종할 것을 결정하고 쓰시마 본령(本領)을 안도(安堵)받았다. 덴쇼 18년([[1590년]])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종4위하 시종(侍従) ・ 쓰시마노카미(対馬守)에 임명되고 난 뒤로 소 씨의 당주는 대대로 쓰시마노카미에 임명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한국명: 임진왜란, 일본명: 분로쿠文禄 ・ 게이초慶長의 역)에서는 공격에 앞서 덴쇼 19년([[1591년]]) 이즈하라에서 옛 [[가네이시 성]](金石城)의 배후에 시미즈 산성(清水山城)이, 가미쓰시마의 오오우라에 撃方山城]이 수축되어 일본군의 중계 기지가 되었다. 쓰시마에서는 소 요시토시가 5,000명을 동원하였다. 요시토시가 거느린 쓰시마 군세는 1번대부터 9번대까지 편성되어 있던 일본군 안에서도 최선봉을 맡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번대에 배속되었다. 분로쿠(文禄) 원년([[1592년]]) 요시토시 등은 일본 전군의 선봉으로써 바다를 건넜고 조선군이나 [[명나라]]군과 교전해, [[부산광역시|부산진]]、[[서울특별시|한성]](漢城)에 이어 [[평양]](平壌)까지 차례로 공략하였다. 요시토시는 전투뿐만 아니라 장인인 유키나가와 함께 일본측의 외교를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유키나가와 함께 양국간 강화를 도모하였다.<ref name=tbs/> 또한 일본의 30만 군대가 바다를 건너는 중계지로 변한 쓰시마에서는 삼았기에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체류하던 병사들이 닭 ・ 개 ・ 고양이 등을 주민들로부터 약탈하는 일까지 벌어져 이를 막는 금령이 내려질 정도였다.<ref name=cho96>長(1981)p.96</ref> 한편 쓰시마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썼다는 투구가 전해지고 있다.
 
요시토시는 [[게이초]](慶長)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유키나가를 따라 서군에 가담하였고 그 자신은 [[후시미 성]](伏見城) 공격에도 참가하였으며, 오쓰 성(大津城) 공격이나 세키가하라 본전에서는 가신을 보내 참전하게 하였다. 서군이 패배한 뒤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로부터 용서를 받고 이후 대대로 [[도쿠가와 씨]](徳川氏)에 신속하면서 조선에 대한 외교창구로써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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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 번은 [[참근교대]](参勤交代) 제도에 기초해 3년에 한 번 [[에도]](江戸)의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에게 출사하여야 했고, 에도에 [[번저]](藩邸)를 두고 이즈하라와의 사이를 번주 자신이 가신들을 거느리고 성대한 행차를 갖추어 오고 갔다. 외교면에서는 [[쇄국]]체제 아래 일본에서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를 맞이하는 등 조일외교의 중개자로써의 역할을 맡았다. 또한 조선과 일본 양국의 중앙권력으로부터 부산포의 초량왜관에서의 교역권을 허가받았다.
 
야나가와 잇켄 이후 조선과 일본 양국의 외교 체제가 정비되고 후추(府中)의 이테이안(以酊庵)에 교토 5산(京都五山)의 선승(禅僧)들이 번갈아 부임해 외교문서를 맡는 「이테이안 윤번제」(以酊庵輪番制)가 확립되는 등 막부의 통제도 강화되었다. 간분(寛文) 3년([[1663년]])에 쓰시마 번은 다섯 척의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항구를 조성하였는데, 오늘날 「오후나에 터」(お船江跡)라는 유적으로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보다 2년 전인 간분 원년([[1661년]]) 니이 군 검지(仁位郡検地)라 불리는 토지조사가 실시되었다. 쓰시마 번은 10만 석 수준의 다이묘로 간주되었지만 실제 쓰시마의 지형과 환경상 쌀 4500석에 보리 15,000석 정도가 쓰시마의 실제 수입이었고 번의 수입은 대부분 조선과의 교역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경작지 면적 내에서 가장 많은 것은 밭이었고, 다음으로 「고바」(木庭)라 불리는 화전이었으며, 검지(토지조사)에서는 「고바」도 백성지고(百姓持高)<ref group="*">>일본 에도 시대에는 검지 즉 토지조사에 따라 품등을 매겨 수확고가 정해졌고, 이를 마을별로 집계해 토지대장에 해당하는 검지장을 작성하였다. 이 검지장의 조사 내용을 기준으로 무라타카(村高)가 결정되었으며 이것이 책정된 땅을 다카우케치(高請地)라 하였다. 이 다카우케치를 소지하고서 검지장(検地帳)에 등록된 농민을 백성지고 또는 고지백성이라고 하였으며, 줄여서 본백성(本百姓)이라고도 하였다.</ref>로 포함되었다. 또한 석고(石高) 제도 대신 겐다카(間高) 제도라는 특별한 생산단위가 채용되었다.<ref name=tbs/>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조일무역과 은 광산의 융성으로 쓰시마는 큰 번영을 누렸고,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나 [[스야마 도쓰안]](陶山鈍翁), 마쓰우라 가쇼(松浦霞沼) 등의 인재도 배출되었다. 당시의 소 씨의 번영은 쓰시마 소 씨의 보리사(菩提寺)였던 반쇼인(万松院) 뿐 아니라 가이진 신사(海神神社)나 와다쓰미 신사(和多都美神社)의 장려함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ref>『ランドジャポニカ』(1996)p.747</ref> 조쿄(貞享) 2년([[1685년]]) 번주 소 요시자네(宗義真)가 후추에 「소학교」(小学校)라는 이름이 붙은 [[학교]]를 세워 가신의 자제들에 대한 교육을 맡게 하였는데, 이는 일본에서 「소학교」(小学校, 한국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이다)라는 이름의 시설이 설치된 최초였다.<ref name=shinbun>[http://www.tsushimanews.com/ 対馬ポータルサイト]{{リンク切れ|date=2017년10月 |bot=InternetArchiveBot }}(対馬新聞社)</ref> 18세기 초에는 스야마 도쓰안의 힘으로 10년 가까운 「이지카오이쓰메」(猪鹿追詰, 해수구제사업)이 실시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쓰시마의 화전경작에 해를 주던 [[멧돼지]]들이 쓰시마에서 절멸되었다.<ref name=cho94>長(1981)p.94</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