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프랑스 관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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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본 교회에 일어난 일이 안남 교회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통킹]]과 [[코친차이나]]에 있는 이 왕 들은 전쟁에서 매우 강력하고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교황청은 [[성좌 (가톨릭)|성좌]]가 기적적인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배가시키는 이 동양 지역에서 자체적인 [[사제]]를 양육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교가 없다면, 이 사람들은 성사없이 죽을 것이며 명백히 지옥으로 떨어질 겁니다.
</blockquote>| 알렉상드르 드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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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이 시기에 베트남에서 [[기독교]]가 박해받음으로써 베트남-프랑스 간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명명제가 즉위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어, [[1836년]]에 유럽인 선교사 7명을 처형하고 수백의 [[교회]]가 파괴되자, 교회탄압을 두려워한 수 만의 민중들이 산이나 들로 숨어들었다. 19세기 중반 베트남의 [[가톨릭]]교도가 45만 명으로 늘어났다. 응우옌 왕조는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을 하였다. [[1840년]]~1860년까지 유럽인 선교사 25명과 [[베트남]] 성직자 300명을 처형하여 2만 명의 신도가 죽었고, 그들의 마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 함대 파병 ====
1842년 영국이 [[제1차 아편 전쟁]]에서 승전하고, [[난징 조약]] 체결로 중국 내 우위를 점하기 시작하자, 프랑스는 남쪽에서 중국으로 접근함으로써 이러한 영국의 개입에 대응하기를 희망하였다. 이에, 1843년 프랑스의 외무장관 [[프랑수아 기조]]는 [[장바티스트 세실]] 제독과 레오나르 샤르네르([[:fr:Léonard Victor Charner|Léonard Charner]]) 대령의 지휘하에 베트남에 함대를 파병하였다.<ref>Chapuis, Oscar (2000), 《The Last Emperors of Vietnam: From Tu Duc to Bao Dai》 Greenwood Publishing Group p.5 {{ISBN|0-313-31170-6}} "Finally, public pressure, manipulated by the Catholic church, forced Guizot to adopt an ambiguous line of conduct. Under the cover of assistance to the British in China, in 1843 he dispatched a fleet under the command of Admiral Cecile and Captain Charner, together with a diplomatic mission headed by Lagrene, who was to negotiate trading privileges with China." </ref> 이것은 프랑스의 베트남에 대한 개입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중국 내에서의 영국의 활동을 돕고, 베트남 내에서 프랑스인 선교사들에 대한 박해에 대한 보복이라는 핑계를 내세웠다.
==== 뜨득 황제 ====
프랑수아 기조는 세실을 베트남으로 보내어 가톨릭교회 선교사인 도미니크 르페브르([[:en:Dominique Lefèbvre|Dominique Lefèbvre]]) 주교를 구출해 오도록 했다.(1845년)
==== 나폴레옹3세 ====
한편,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1851년)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프랑스가 동아시아에 세력을 확장하지 않는다면 2류 국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가 문명화된 서구 문화를 전파해야 할 임무를 띠고 있다는 사상이 퍼져 있었다. 결국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은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ref name="신승하"/>{{Rp|335~337}}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영국]]과 연합하여 [[제2차 아편 전쟁]]([[1856년]]~[[1860년]])을 치르는 한편
=== 홍 강 통상 문제와 북부 베트남 공략(1867년~1883년) ===
응우옌 왕조에서는 1865년에 [[레 왕조]]의 후손이라 자칭하는 사람의 반란 등, 반란이 빈번히 일어났고, 1867년 [[태평천국]] 계통의 오곤(吳鯤)의 [[흑기군]]이 침입해와서 프랑스와 대립하였다. 1867년 [[프랑스]]는 남부 [[베트남]]과 [[사이공]]을 점령하고 [[코친차이나]]로 개명했고 코친차이나의 식민지화에 성공한 프랑스는 [[메콩강]]을 이용한 중국 [[윈난]]과의 통상로 개발을 추진했다. 상세한 조사를 한 결과, 메콩강 중류는 현재의 [[라오스]], [[캄보디아]]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급류 및 암초가 많아 그 상류로는 항해가 불가능하였으므로 통상로로 이용하는 것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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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년 7월 19일 – 1871년 5월 10일)에서 패한 이후, 점차 국력을 회복하여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인 진출을 기도하고, 1881년에 프랑스 의회는 240만 프랑을 베트남에서 군비로 사용하도록 승인하였다. 1881년말, [[홍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던 프랑스인이 [[흑기군]]에 저지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령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 총독 르 밀 드 비렐 제독은 갑술조약(또는 제2차 사이공 조약, 1874년) 위반을 문책하기 위해 프랑스 교지지나 해군함대 사령관 앙리 리비에르([[:fr:Henri Rivière|Henri Rivière]]) 해군 대령을 하노이에 파견하였다. 1882년초에 하노이에 도착한 리비에르는 교섭이 무익하다고 판단해 즉시 군사행동을 개시하여 1882년 4월에 [[하노이]]를 점령했다. 그리고 다음해 1883년에는 흑기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ref name="신승하"/> {{Rp|337~339}} [[뜨득]]의 원군 요청을 받은 청나라는 통킹 지방에 출병하였고, [[흑기군]]도 떠이 선(西山)을 거점으로서 프랑스군과 대치했다.
한편, 1882년에 [[청나라]]의 [[이홍장]]은 프랑스 공사 보우리(Bou-ree)와 [[톈진]]에서 담판을 시작하여 가조약 3조에 합의하였다. 즉 중국은 군대를 [[운남]], [[귀주 성]]으로 철수시키고, 프랑스도 베트남을 침략점거하지 않으며, 베트남 국왕의 위신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며, 보승(保勝)을 개항하여 중국과 프랑스가 여기에서 무역하며, 또한 이곳을 중국의 영토와 같은 비율로 세금을 징수하고, 중국과 프랑스는 경계를 설정하여 베트남 북부의 자치를 보호한다고 하였다.<ref name="신승하"/> {{Rp|337~339}} [[톈진]] 담판의 가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군은 철군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베트남 북부의 변경을 순시하였는데, 이 사실을 몰랐던 [[흑기군]]은 이들과 충돌을 일으켜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위기를 맞이한 응우옌 왕조에서는 급기야 1883년 7월 9일, [[뜨득]] 황제가 사망한다. 이어 7월 20일 [[죽득]] 황제가 즉위하지만, {{출처|날짜=2011-09-29|여자를 밝히는 성격이라는 이유로 완조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완문상과 존실설에 의해}} 불과 3일 후인 7월 23일 폐위되고 7월 30일에 [[히엡호아]] 황제가 옹립 되었다. 응우옌 왕조 내부의 극심한 혼란을 틈타 프랑스는 [[후에]] 공략을 결정하고, 1883년 8월에 [[후에]]의 외항인 후안을 공략하고 그대로 후에로 진격하자 [[응우옌 왕조]]는 저항하지 못하고 강화를 요청하여, [[계미조약]]([[제1차 후에조약]], [[아르망 조약]])이 체결되게 된다. 이 조약으로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어, 안남(중기)은 완조에 의한 통치를 인정하였지만, 통깅(북기)에는 프랑스 영사관을 설치, 비엔투안 성을 [[프랑스]]에게 할양하며, 프랑스는 [[홍 강]]의 양안에 군사 보급지를 설치하고 [[흑기군]]을 축출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이 [[청나라]]에 전해지자 주전파들은 베트남의 원조를 주장하였다. 단지 [[공친왕]]과 [[이홍장]]은 무력 사용을 반대하고 외교적인 방법으로 베트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여 '[[이홍장]]-트리코 회담'이 다시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북위 20도선을 경계로 하자는 [[이홍장]]의 주장과 북의 22도를 경계로 하자는 프랑스의 주장이 대립하여 결렬되고 결국, 프랑스는 무력으로 베트남 문제를 해결하고자 흑기군에 대하여 공격을 시작했다.<ref name="신승하"/> {{Rp|337~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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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베트남 전역 지배(1884년~1945년) ===
프랑스는 1884년 4월에 포르니에르(Fo.E.Fournier)를 [[청나라]]에 파견하여 [[이홍장]]과 담판하게 하였다. 그 결과, 청은 프랑스의 베트남 보호권을 승인하고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변경으로 철수시키기로 하는 대신, 프랑스는 중국의 변경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5개조로 된 '청-프 간명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랑스도 대대적인 중국 침략계획을 수립하고 해군에게 [[타이완]] 섬의 기륭을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복곤]]의 마미(馬尾)를 공격하여 [[청나라]]의 [[복건 함대]]를 패퇴시켰다.<ref name="신승하"/> {{Rp|339~341}} [[끼엔푹]] 황제는 즉위 후 불과 8개월 만에 사망(1884년 7월 31일)하고, [[끼엔푹]] 황제의 남동생인 [[함응이]] 황제가 즉위(8월 2일)했다.
이때 [[영국]],[[미국]],[[독일 제국|독일]] 등이 조정에 나섰는데, 특히 영국은 총세무사인 하트를 이용하였다. 하트는 영국정부로부터 위임을 받고 중국해관의 영국 런던사무처의 캄벨(James Dunean Campbell)을 1885년 4월에 [[프랑스]] [[파리 시]]로 파견하여 '청-프 간명조약이 유효하다'는 전제 아래 [[프랑스]]와 정전협정을 체결하였다.<ref name="신승하"/> {{Rp|339~341}} 그리하여 [[청불 전쟁]]은 끝났으며, 1885년 6월에 [[이홍장]]과 프랑스 공사인 [[쥘 파트노트르]] 사이에 [[톈진]]에서 "청-프 신약" (혹은 [[톈진 조약 (프랑스)|톈진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중국이 베트남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인정하였다. 이로써 청나라는 응우옌 왕조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과 베트남의 변경 두 곳의 통상 장소를 정하기로 하는 한편, 프랑스 화물은 베트남과 [[광서]] 변경에서 관세율을 감하기로 하고, 이후 중국에서 철도를 건설할 때 프랑스와 협상하도록 하였다.<ref name="신승하"/> {{Rp|339~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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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의 진주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종료 ===
[[중일전쟁]](1937년~1945년)이 격화되면서, [[일본 제국 육군]]은 베트남으로부터 [[중국 국민당|국민당]] 정부로의 물자수송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북부에 진주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에서는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무릎을 꿇었고,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 [[비시 정권]]이 임명한 장 드꾸(Jean Decoux) 장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는 일본과 협력하여 [[일본군]]의 베트남 주둔을 허용하는 조약에 서명하여
== 베트남민주공화국과 프랑스의 갈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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