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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일대의 친고려 호족들을 토벌하기 시작한 견훤은 서부에서도 [[고려]]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는데, [[929년]]에는 [[고려]]로부터 [[나주]]를 다시 빼앗아 장악하고, 7월에 견훤이 친히 갑사 5천을 거느리고 의성부를 쳐서 성주 홍술을 죽였다. [[왕건]]은 이 소식을 듣고 "나는 양손을 모두 잃었다"며 비통해 했다고 한다. 나아가 [[후백제]]군은 10월에 고사갈이성 공격을 시도했고(《[[고려사]]》) 가은현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12월에는 대군으로 고창군(안동)을 포위하였다.
 
[[930년]] 1월에 [[왕건]]은 병산에, 견훤은 석산에 주둔하여 대치하였다. 1개월여간의 대회전 끝에 견훤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전례가 없을 정도로 대패하여 전사자만 8천여명에 이르렀고, 자신의 참모인 시랑 [[김악]]이 고려군에 포로로 잡히기에 이른다. 이 고창 전투의 승리는 그곳 유력 호족들인 김선평,권행,장길의 막판 고려군 참전의 공이 크지만 이들은 1개월여간에 계속 관망만 하고 있다, 승기가 고려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아니면 최소한 전투가 백중세인 것을 감안해 출정해 고창 전투에서 이들의 활약이 과장된 면이 크다. 그외에 고창 전투의 결정적인 승리 요인들은 [[유금필]]이 고창 전투 직전에 공훤과 홍유와는 달리 후백제군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것을 왕건에게 강력하게 요청해 승락을 얻은 후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저수봉으로 진격하여 저수봉을 빼앗은 이후로것과 이후 여러 전투들에서 고려군들이 계속 분투하여 [[고려]]군이 대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튿날 잔병으로 견훤은 순주성(안동 풍산)<ref>이는 [[삼국사기]]의 설이다. [[고려사]]에서는 영주 순흥으로 이야기하며, 또한 [[929년]] 음력 7월에 있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음력 9월에 [[왕건]]이 영주로 오기 위해서는 바로 옆 고을인 순흥을 견훤이 점령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삼국사기]]의 지명 및 사건 배열 순서를 따랐다. </ref>을 공격하였고, 장군 원봉이 도주하자 백성을 거두어 [[완산주]]로 퇴각하였다.
 
이 패배로 견훤은 경상도 일대에서의 패권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삼한 전체의 패권도 급속히 상실하게 된다.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이 [[930년]]에 대거 [[고려]]로 돌아서게 되며, [[신라]] 또한 [[931년]]에 [[왕건]]을 [[서라벌]]로 초대하였다. 이후 견훤은 다시는 경상도 전역에 대해서 패권을 확보하지 못한다.
 
[[932년]] 6월에 매곡성(청원)의 성주이자 견훤의 심복이었던 [[공직]]이 [[고려]]에 투항하였는데, [[공직]]은 [[왕건]]을 부추겨 일모산성(연산군)을 공격하게해 왕건은 그해 7월에 군대를 거느리고 일모산성을 직접 공격해 11월에 일모산성을 함락시켰다. 공직이 항복하자 견훤은 완산에 남아있던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한 명을 잡아다 친히 국문하고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9월에는 [[후백제]]의 일길찬 상귀가 수군으로 [[고려]]의 염주, 백주, 정주의 전함 100척을 파괴하고 저산도 목장의 말 3백필을 약탈하였으며, 10월엔 해군장군 상애가 대우도(평북 용천)를 침략해 [[고려]]의 당시 수군 총사령관이었던 대광 왕만세까지 패퇴시키기도 했지만, 이들은 결국 당시 고려 조정 내부의 참소로 곡도로 귀양 와 있던 [[유금필]]에게 격파당했고 이후 다시는 해군을 동원해 고려의 내해와 섬들, 육지를 침략하지 못했다. 후삼국 시대와 고려시대에 대한 정사들인 삼국사기 견훤 열전,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는 932년 9월과 10월 이후 후백제 해군의 고려 내해와 섬들,내지의 침공 사실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935년, 왕건의 명을 받은 유금필이 이끄는 고려군이 929년에 후백제군에게 빼앗긴 나주 지역을 탈환했다고 나온다. [[933년]] 5월엔 수천명으로 추정되는 견훤의 맏아들 [[신검]]을 통군으로 하는 [[후백제]]의 군대가 혜산성과 아불진(경상북도 경주시 부근)을 공략하면서 신라의 수도인 경주까지경주 함락근처까지 신라가 멸망 위기에 몰리자처하자, 이를 막기 위해 왕건이 당시 의성부(경북 의성)를 지키고 있던 유금필을 긴급히 출동시켰고, 유금필은 당시,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들중 급히 추려 출정한 결사대 80명의 병력과 사탄(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에 위치한 여울)을 건너 신검의 군대와 마주쳤지만, 신검의 군대는 유금필군의 기세에 눌려 싸워보지도 못하고 달아났고(고려사 유금필 열전,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만, 결사대의 지휘관인 유금필은 두렵지 않고 그의 부하 병력들만 매우 두려워해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났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당연히 유금필도 그의 부하 병력들과 함께 두려워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의 부하 병력들보다 유금필을 더 두려워했을 것이다.)이후 유금필은 경주에 도착해 경주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했고, 이후 유금필과 그의 결사대가 돌아오는 길에 사탄에서의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 신검의 후백제군이 자도에서 유금필과 그가 거느린 80명의 결사대를 공격했지만 금달,환궁 등 후백제 장군 7명이 사로잡히고 그외에 수많은 병사들이 죽고 사로잡히는 굴욕적인 패배를 다시 당했고, 자도에서의 유금필군의 전설적인 승전 소식을 접한 왕건은 '우리 장군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유금필에게 매우 크게 감탄했다고 고려사 유금필 열전,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 기록되어 있다.
 
[[934년]] 9월, [[왕건]]이 운주 일대를 빼앗을려고 진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견훤은 갑사 5천명을 뽑아 운주로 진군했지만 고려군의 기세가 강성해 승산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양군이 서로 싸우는데 세를 온전하게 갖추지 못하여 무지한 병졸들이 많이 살상될까 걱정입니다. 마땅히 화친을 맺어 각자 영토를 보전하도록 해야겠습니다."라며 [[왕건]]에게 화의를 청했지만, 고려군이 자신의 영토를 빼앗을려고 진군해왔는데도 화의를 청해, 평소의 패기 있고 자신만만해하던 견훤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 근본적으로 930년 고창 전투때부터 지금까지 고려군에게 전체적으로 패배를 거듭해서 사기가 크게 떨어진 후백제군과 견훤 자신의 약해진 모습을 고려군에게 보이는 것밖에 되지 않았고, 견훤의 이런 약해진 모습을 간파한 [[유금필]]이 왕건에게 견훤군을 공격할 것을 요청해 왕건은 이를 받아들였고, 이후 유금필은 강력한 기병 수천명을 이끌고 돌격해 후백제가 미처 진을 치지 못한 사이에 [[후백제]]군을 쳐서 대패시키고 [[후백제]]측의 술사 [[종훈]]과 의사 [[훈겸]], 용장 상달과 [[최필]]을 사로잡았고, 후백제군 3000여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이 전투의 패배로 웅진 근처의 30여개의 성들이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ref name="견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