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 만키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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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라 현]](奈良県) [[고세 시]](御所市)의 [[부라쿠민|피차별부락]](被差別部落)의 사원으로 [[정토진종|정토진종 혼간지파]](浄土真宗 本願寺派)에 속하는 사이코지(西光寺)에서 태어났다. 청년기 부라쿠민으로써 온갖 차별에 시달리며 학교를 전전하다 고향을 떠나서 화가를 지망하는 등 출신을 둘러싼 고민을 경험했던 그는 [[1918년 쌀 소동]]의 영향으로 동향 출신의 맹우인 [[사카모토 세이이치로]](阪本清一郎, 훗날 사이코와 함께 수평사를 공동설립한다), [[고마이 기사쿠]](駒井喜作) 등과 함께 청년 운동, 사회 개조 운동에 몰두하였다. 이 무렵부터 많은 사회활동가들과 면회하기도 하였는데, 그 계기에 대해서 사이코 만키치는 만년에 「무슨무슨 주의자(主義者)는 부라쿠민을 차별하지 않았으니까」라는 단순한 이유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의 사회주의 사상(크리스트교 사상), 사노 마나부(佐野学)의 공산주의 사상 등에 영향을 받아 전국수평사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1922년]] 2월 대일본평등회 창립대회에서 축사가 끝날 무렵 사이코 만키치는 연단에 서서 혼간지 승려의 축사 내용을 조목조목 따지며 기백 넘치는 연설을 했고,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자 수평사 창립을 알리는 '삐라' 1만 장이 뿌려졌다. 대회장은 부락민들의 선전장이 된 셈이었다. 이 일로 3월 3일 교토에서 열린 수평사 창립식은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뒀고, 그 후 수평사는 대표적인 민권단체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일본의 전국수평사는 마찬가지로 조선의[[조선]]의 피차별신분이던피차별 백정들이신분이던 조선형평사를[[백정]]들이 [[조선형평사]]를 조직해 백정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과 처우 변화에 나서는 데에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형평사와 전국수평사가 공조하기도 하였다.
 
사이코 만키치는 노동농민당(労働農民党)、제2차 일본 공산당에도 참가하였으나 일본의 군국주의가[[군국주의]]가 갈수록 심해지는 가운데 민족주의 성향을 띄기 시작하던 조선형평사가 일제의 탄압으로 [[1935년]] 해체당하고, 사이코 만키치 자신도 [[3·15 사건]]으로 검거되어 투옥되었고, 사상 전향을 강요당하였다. 결국 사이코는 전향서를 제출하고서야 가석방되었으며, 전국수평사 역시 우익 국수주의로 기울어 태평양 전쟁 중이던 [[1942년]]에는 아예 활동을 중지하였다. [[국수주의]]에 경도된 사이코는 황국농민동맹(皇国農民同盟) 등 극우 단체를 지휘하기도 하였으며, 국가주의의 관점에서 대일본청년당(大日本青年党)과 협동하고 천황제 아래서의 부라쿠 의식(部落意識)의 해소를 도모한다는 「신생운동」(新生運動)을 일으켰다. 나아가 사카모토와 함께 이시카와 준주로(石川準十郎)의 대일본국가사회당(大日本国家社会党)에 입당해 국가사회주의 운동에도 가담하였다. 이러한 사이코 만키치의 융화주의적 자세는 「수평사」 시절의 사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제국이 패망한 뒤, 사이코 만키치는 다시 한 번 일본의 재군비에 반대하였고 전쟁 지역 또는 빈곤 지역에 비무장집단 「화영대」(和栄隊)를 파견해 「부전화영」(不戦和栄)을 호소하였다.<ref>明石書店「水平社宣言起草者西光万吉の戦後」</ref>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 금지운동에도 가담하는 등 사회 운동에도 힘쓰는 것은 여전했지만, 부라쿠 문제에 관한 것은 없었고, 생애에 공적인 자리에서 부라쿠 해방운동에 투신했던 것을 포함한 자신의 반생을 회고할 기회도 없이 화가로써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