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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영 ===
[[수 양제]]가 산과 들을 깎아 만든 [[대운하]]로 물류의 중심지가 되어, 일약 번영하게 된다. 또 양제는 이곳을 자주 행차하여 방탕에 빠졌기 때문에, 망국에 이르게 한 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당대에는 이미 국제항으로서의 지위를 가져 교역이 발전하였고, 명대 이후는 현재의 장수성의 동부를 중심으로 한 [[염전]]을 채취하는 소금의 집적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이 땅에 호상(豪商)을 낳아, 문화의 꽃을 피게 하는 기초가 되었다.
 
[[수나라|수]] [[수 문제|문제]](隋文帝) 개황(开皇) 9년([[589년]]) 오주를 양주로 고치고 양주총관부(扬州总管府)를 두었는데, 다만 총관부 치소는 단양군(丹楊郡, 오늘날의 난징 시)에 설치되었다. [[수 양제|양제]](炀帝) [[대업]](大业) 3년([[607년]]) 양주를 강도군(江都郡)으로 고치고 치소를 강양현(江阳县, 개황 18년에 광릉현을 한강邗江으로 개칭하고 수 양제 대업 원년에 강양江阳이라고 불렀다) 수 양제는 이곳 양저우를 몹시 좋아해 오랫동안 이곳에 머무르기도 했으며 옛 신하 우문화급에 의한 시해 사건과 양제 자신의 무덤 역시도 양저우에서 벌어지고 양저우에 마련되었다. 양저우는 수 양제의 방탕과 죽음, 나아가 수 왕조의 몰락을 가져온 도시이자 동시에 양제가 자신의 국가를 멸망에 이르게 할 정도의 막대한 인력과 경비를 동원해서 산과 들을 깎아 만든 [[대운하]]의 혜택을 입었는데, 이 대운하는 이후 양저우를 물류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릴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당나라|당]] [[당 고조|고조]](唐高祖) 무덕(武德) 8년([[625년]]) 양저우의 치소를 단양에서 광릉으로 옮기게 되면서 광릉이 양저우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운하와 장강 물길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던 당대의 양저우(즉 오늘날의 양저우)는 대당 제국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발전을 거듭하게 되고, 양저우의 경제적 지위는 당 중기에 이르면 수도인 장안이나 낙양을 능가하는 제국 최대의 상업도시가 되었다. 이 무렵의 양저우는 "부유함이 천하에 으뜸이었다"(富甲天下), "천하의 번성함을 양주를 으뜸으로 삼았다"(天下之盛扬为首), "(천하의 부유함은) 양주가 으뜸이고 익주는 둘째였다"(扬一益二)라고까지 불렸다(익주는 오늘날의 成都市이다). 당 왕조의 양저우는 회남도(淮南道)에 속했고 여섯 개의 현을 두고 있었는데, 강도현(江都县)、강양현(江阳县)、양자현(扬子县)、해릉현(海陵县)、고우현(高邮县) 그리고 육합현(六合县)이었다. 여기에 당 현종(玄宗) 천보(天宝) 원년(742년) 천추현(千秋县, 훗날 天长县으로 고침)을 더 늘려 설치하였다.
 
당대의 양저우는 [[농업]], [[상업]] 그리고 [[수공업]]이 상당히 발전해 대량 생산을 위한 수공업 작업장과 공장이 등장했으며 방장경(方丈镜)、강심경(江心镜) 등 고급 구리거울이 많이 생산되었다. 양저우는 또 남북으로 곡식, 풀, 소금, 화폐, 쇠붙이 등이 오가는 중심지이자 국내외 외교적 통로이기도 하였다. 이미 정치적으로도 도독부(都督府), 대도독부(大都督府),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의 치소가 이곳에 세워졌으며 회남과 장강 북부 여러 주현을 관리하였다. 낙양이 중심이 되는 수당 시기 대운하의 수륙교통에서 양저우는 내내 그 중요한 위치를 벗어나거나 내어준 적이 없다.
 
당대의 양저우는 또한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로 외교적 중심지였으며 [[이슬람 제국]]과의 교류도 빈번하였다. 양저우에는 대식 즉 페르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거주하는 곳이 있었고 그곳에 거주하는 페르시아 사람들은 천 명을 헤아렸으며, [[페르시아]] 뿐 아니라 [[이슬람 제국]], [[인도]], 곤륜(동남아시아), [[신라]], [[발해]], [[일본]]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 양저우에 머무르면서 상업 활동에 종사하였다. 외교의 창구 역할을 했던 만큼 양저우로부터 중국의 문화가 외국으로 전파되기도 하였는데, 일본의 [[견당사]](遣唐使)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불법을 전했던 당의 고승 [[감진]](鉴真) 역시 양저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중일 양국간의 정치적, 경제적, 과학 그리고 문화적인 교류를 촉진하였다. 또한 만당 시기 신라인으로써 당에 유학 온 [[최치원]](崔致遠)은 양주에서 4년 정도 관직생활을 하였으며 훗날 회남(淮南)에서 신라로 당의 조책을 가지고 가는 사절의 자격으로 귀국하였으며, 회남에서 고병의 막부 종사관으로 일하면서 썼던 글들을 모아 《[[계원필경집]]》(桂苑笔耕集)은 현존하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이자 중국 당 말기 번진들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꼽히고 있으며, 최치원은 사후 동국유종(東國儒宗)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당대의 양저우는 문화적인 면에서도 눈에 띄는 진보를 이루었다. 양저우 사람이었던 학자 이선(李善)은 전대 사람들의 성과를 토대로 《문선》에 다시금 주석을 더하였고, 널리 자료에 입각해 고증하면서 오늘날 전하지 않은 중요한 문헌 자료 대부분을 보존해 후세에까지 전해질 수 있게 하였다. 그 아들 이옹(李邕)은 문장이나 시가에만 그치지 않고 당대 서예가로써 이름이 높던 우세남(虞世南)이나 저수량(褚遂良)의 뒤를 잇는 서예가로써 이름을 떨쳤다. 양저우의 시인인 [[장약허]](张若虚)는 [[하지장]](賀知章) · [[장욱]](張旭) · [[포융]](包融)과 함께 오중사사(吳中四士)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그의 《춘강화월야》(春江花月夜)는 그 1수만으로도 "이 시 한 편이 당대 모든 시기의 시들을 압도하고 있다"(以孤篇压倒全唐)라는 명예를 얻기에 충분하다. 또한 당대에 [[두목]](杜牧), [[백거이]](白居易) 등 적지 않은 많은 시인들이 모두 양저우에 우거하거나 양저우에 들러서 머무르며 훗날에까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될 명시를 많이 남겼다. 당의 시선(詩仙)으로 칭송되는 [[이백]](李白)이 [[맹호연]](孟浩然)을 전송하면서 양저우까지 왔을 때 썼다는 송별시의 "꽃 피는 3월에 양주로 내려가도다"(烟花三月下揚州)라는 구절 또한 송별시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러한 경제적, 문화적인 위치가 양저우를 조정에 맞서려는 자들을 이끌기도 했다. [[684년]] 서경업(徐敬業)과 낙빈왕(骆宾) 등이 양저우에서 측천무후 타도를 외치며 거병하였으며, 만당 시대에는 번진이 할거하면서 군벌들이 양저우를 얻기 위해서 싸웠고 양저우는 그 와중에 서서히 황폐해지고 몰락해갔다. [[당 희종|희종]](僖宗) [[광계]](光启) 3년([[887년]]) 양행밀(杨行密)이 광릉을 반년 동안 포위해 성안에 굶어죽은 사람이 태반이나 되었다. 이때의 양저우의 참상을 "선주군(宣州軍)이 들어 와서 사람들을 약탈하고 멋대로 끌어내서 내몰고 묶어서 죽이는 것이 양이나 돼지 다루듯 하였고, 소리 한 번 내지 못하였으며 피가 방시(坊市)의 도랑에 흘렀다"(《자치통감》)고 전하고 있다. 양행밀은 양저우에 자신의 지방정권을 세웠는데(양오) 이때 양저우는 경제적으로 잠시 회복할 기미를 보이기도 했지만, 오래지 않아서 다시 전쟁에 말려들어 황폐해지고 말았다.
 
청대의 양주팔괴(揚州八怪)를 비롯한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고, 양극(揚劇)이나 서화, 분경, 요리 등이 같이 발전하여 중국 문화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