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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왕조 시절 양저우는 과학기술 방면에서도 눈에 띄는 발전을 보이는데, 11세기 송 왕조의 사천감(司天監)을 지내고 《[[몽계필담]]》의 저자로써 [[진북]]과 [[자북극|자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세계 최초로 밝힌 것으로도 유명한 [[심괄]](沈括)이 자신의 과학기술 관련 저작 대부분을 양저우에서 완성하였던 것이다. 또한 [[구양수]](欧阳修), [[소식]](苏轼) 등의 문인이 양저우에 우거하면서 평산당(平山堂) 등 인문학의 명소가 될 곳들을 세웠다. 이십사효(二十四孝)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양저우 톈장 사람 주수창(朱寿昌)의 사적도 유가(儒家)에서 강조하는 효(孝)의 한 전범으로 꼽히고 있다.
 
[[북송]] [[정강]] 원년([[1126년]])부터 [[남송]] [[건염]] 3년([[1129년]])까지 여진족의 금이 강남동로(江南东路)、강남서로(江南西路)、형호남로(荆湖南路) 북부와 양절로(两浙路) 북부 대부분을 점령하고 [[간저우 시|간저우]](赣州)까지 밀고 내려왔다. 양저우는 [[1129년]]에도 금의 침략을 당했고, 남송이 금과 화친을 맺은 뒤에 회수가 양국의 국경이 되었고, 오늘날의 양저우 시 북부 교외가 금 왕조를 방어하는 최전선이 되었다. 송의 문인 강기(姜夔)는 이때의 모습을 《양주만》(扬州慢)이라는 작품으로 읊었다.
 
13세기 [[몽골 제국]]이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전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몽골 제국 내에서 이전의 중국 왕조와 같은 체제를 수용한 원(元)의 지배 아래서 양주는 하남강북등처행중서성(河南江北等处行中书省)에 속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