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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방면에 대한 공략 ====
[[920년]] 9월에 견훤은 다시 아찬 공달(功達)을 [[고려]]에 보내어 다시 공작의 깃으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의 대나무 화살을 바치며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고서, 10월에 [[920년]] 10월, 견훤은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마침내 오랜 숙원이었던 대야성 공략에 성공한다. 과거 대야성을 공격했다가 쓰라린 패배를 경험한지 무려 19년 만의 일이었다. 대야성은 중요한 요충지로, 후백제군은 대야성을 빼앗음으로써 신라의 본토를 습격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된것이다. 견훤은 승세를 타고 구사성(仇史城)까지 함락시켰고, 진례성까지 공격하려 하였으나 신라 왕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이 군사를 움직이자 다시 물러났다. 고려사 박수경 열전을 보면 이때의 고려 지휘관은 박수경으로 추정이 되고 박수경 열전에는 왕건의 명령을 받아 신라로 간 박수경이 거듭해서 견훤군을 패배시켰다고 적고 있어 이때 견훤군은 박수경에게 패해서 물러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러나 견훤은 왕건의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는 고려의 혼란을 이용하여 [[웅진]](오늘날의 [[공주]])까지 진출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를 두고 견훤이 겉으로는 왕건과 화친하였으나 속뜻은 완전히 달랐다고 비난하였다.]
 
 
 
[[921년]] 여름에 [[도선]]의 제자인 [[경보 (승려)|동진대사]](洞眞大師) 경보(慶甫)가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후백제]]의 수도 완산에서 멀지 않은 임피군에 도달했고, 이때 견훤은 경보를 맞아들여 남복선원(南福禪院)으로 올 것을 청했다가 다시 경보가 스승의 옛 거처인 백계산 [[옥룡사지|옥룡사]]로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 해 말에 [[후백제]]의 궁창과 명권이 [[고려]]로 투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