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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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도쿄 대학]] 문학부에 새로 들어가, 역사학을 전공했다. [[1955년]] [[도쿄 여자 대학]]에 교수로 나가 강의 활동을 시작했고,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덴리 대학]], [[다쿠쇼쿠 대학]] 등에서도 교수로 지냈으며, 일본 오리엔트 학회의 회장을 지냈다. [[1994년]] 6월에는 [[런던 대학]] 동양·아프리카 연구학원의 명예회원에 위촉되었다.
 
[[1998년]]에는 [[장쩌민]]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을 만나 [[난징 대학살]]을 비롯한 일본의 중국 불법 침략 행위에 대하여 사과와 애도의 뜻을 비쳤고<ref>[http://news.donga.com/3//20060811/8338842/1 히로히토日王동생 “中침략 사죄”] {{웨이백|url=http://news.donga.com/3//20060811/8338842/1 |date=20150120094835 }}, 동아일보, 2006년 8월 11일.</ref>, [[2004년]]에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간토 대지진]] 직후 일어난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재일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하여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발언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0229466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잊지 말아야"], 한국일보, 2004년 4월 16일.</ref>
 
아내 [[미카사노미야 유리코|유리코]]와는 금슬이 좋았으나, [[2002년]] 막내아들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를, [[2012년]]에 장남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를, [[2014년]]에는 차남 [[가쓰라노미야 요시히토]]를 잃는 바람에, 미카사노미야 내외는 살아 있을 때 아들 3명을 먼저 보내는 참척을 많이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