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자꾸 님 개인 주장을 하시면, 독자 연구 및 문서 훼손 행위로 차단 신청하겠습니다. |
Coreanhistory (토론 | 기여) |
||
4번째 줄:
|존속기간_시작=676년
|존속기간_끝=935년
|p1 =
|p2 = 백제
|p3 =
|p4 = 보덕국
|s1 = 후삼국 시대
|국기_그림 =
|문장_그림 =
|문장_이름 =
|공용어=[[신라어]] ([[고대 한국어]])
|입법부 = [[화백]]
31번째 줄:
|종교=[[불교]], [[유교]], [[무속신앙|무교]]
}}
'''통일신라'''(676년~935년)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가 한반도
== 명칭 ==
{{참고|남북국 시대}}
[[한국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일반적으로 제29대 [[무열왕]] 이전을 [[삼국 시대]]라고 한다. 무열왕이 한반도 남부를 통합한 사건을 두고 통일신라 시대라고 하는데,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백제, 가야 등에 대해서는 인적 물적 통일을 이루었다고도 할 수 있으나, 고구려는 발해가 인적 물적 승계를 이루었기에 삼국 통일, 통일 신라 등의 표현은 틀린 것이다. 남쪽의 신라가 소멸할 때까지 북쪽의 발해가 대부분의 시기를 공존했으므로 [[남북국 시대]]라고 하는 것이 맞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가 세워진 698년까지의 시기를 구분하고자 할 때에도 '원삼국 해체기' 등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며 한국사를 신라를 기준으로 구분하고자 한다면 '후기신라 등의 표현이 적절하다.
== 역사 ==
54번째 줄:
=== 전성기 ===
신문왕 때에는 김흠돌의 모역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들에 대한 숙청을 가하였다. 이 후,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화백|화백회의]]를 주도하여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으며, 녹읍을 폐지하고 수조권만을 인정한 관료전(官僚田)이 지급하는 등 신문왕은 진골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또한 5묘제를 설치하여, 태종무열왕계의 정통성을 강화하였다.<ref><한국의 전통예술> ( 한국문화재 보호재단 편집부 저 ) 304p</ref> 이 후 685년에 사지(舍知)를 설치하여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의 5단계 관직제도를 완성하였으며, 같은 해에 지방제도인 9주 5소경제를 확립하였다.
80번째 줄:
== 경제 ==
== 문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