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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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여기는 한자사전이 아니잖아요. 해당 한자의 의미를 서술하는 것은, 한강이라는 단어의 뜻을 설명하는 것이기에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그 한자 자체에 대한 분석이 "한강"이라는 문서와는 연관성이 없어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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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를 지나 백제를 비롯한 [[마한]]의 몇몇 소국이 한강에 자리를 잡았고, 그 중 [[하남 위례성]]에 도읍한 백제가 한강 일대를 차지하였고, 이후에는 고구려가 한강을 차지한다. 진흥왕 때에 신라는 한강을 차지한다. 이처럼 한강 유역을 소유하면 나라가 번영했다는 것에서 한강이 한반도에서 지리·인구·외교 등에서 훌륭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한반도를 띠처럼 둘렀다는 뜻으로 '''대수'''라 불렀다.<ref>[[반고 (후한)|반고]], 《[[한서]]》 제28권 ― 지리지.</ref> 그리고 [[고구려]]는 한강을 '''아리수'''<ref>[[광개토왕릉비]] 396년 기사</ref>, [[백제]]는 '''욱리하'''라 했다.<ref>《[[삼국사기]]》 25권 <백제본기> 제3 개로왕</ref> [[신라]]는 한강의 상류를 '''이하''', 하류를 '''왕봉하'''라 하였다.<ref>《[[삼국사기]]》 3권 <신라본기> 제3 자비마립간 11년 기사</ref>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때 한강을 '''북독'''이라고 했다.
 
[[고려]] 시대에는 한강 유역 대부분을 [[고려의 행정 구역#5도 양계|양광도]]가, 그리고 [[북한강]] 유역은 [[고려의 행정 구역#5도 양계|교주도]]가 관할했고, [[고려의 행정 구역#3경|지방 3경]] 중 하나인 [[서울특별시|남경]]과 [[목 (행정 구역)|12목]] 중 광주목·충주목·청주목이 있었다. 당시 한강은 물줄기가 맑게 뻗어 내린다 하여 '''열수'''라 했고, 모래가 많아 '''사평도''', '''사리진'''이라고도 불렀다.
 
고려가 멸망하고 건국된 [[조선]]은 한강 유역의 한양에 도읍을 정했다. 한양으로 천도한 이유는 한강의 수운 조건과 [[풍수지리설]]의 영향 그리고 정치적 배경 때문인데, 당시에 한강이 교통이 편리하고 지리적으로도 좋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양의 [[경창]]은 조세로 징수한 미곡과 포백을 운송하는 [[조운 (제도)|조운]]제도의 중심이 되었고, 9개의 [[조창 (기관)|조창]] 중에서 충주의 [[가흥창]]·원주의 [[흥원창]]·춘천의 [[소양강창]] 총 3개소가 한강 중류와 상류에 있었다. 한양 근처의 한강은 '''경강'''이라 했는데 조운을 통해 경강에 많은 상인이 모이며 하나의 경제권이 형성되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서울 강'''(Seoul river)이라는 표현이 외국 문헌에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한강 곳곳에 [[진 (군사)|진]]을 설치하고 수비하게 하였다.
[[파일:Hangang Railway Bridge.jpg|섬네일|[[한강철교]]와 [[한강대교]]]]
조선 말에는 [[병인양요|프랑스]]와 [[신미양요|미국]]이 한강과 [[강화도]]에 침입했고, 개항을 한 후에는 [[증기선]]이 한강에서 운항하기도 하였다. [[1900년]]에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철교인 [[한강철교]]가 완공되었고, [[1916년]]에는 최초의 [[한강대교|인도교]]가 가설되었다. [[1912년]], [[1920년]], [[1925년]]에는 큰 홍수가 났었는데, 특히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한강 유역이 수몰되는 등의 큰 피해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