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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여기는 한자사전이 아니잖아요. 해당 한자의 의미를 서술하는 것은, 한강이라는 단어의 뜻을 설명하는 것이기에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그 한자 자체에 대한 분석이 "한강"이라는 문서와는 연관성이 없어보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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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를 지나 백제를 비롯한 [[마한]]의 몇몇 소국이 한강에 자리를 잡았고, 그 중 [[하남 위례성]]에 도읍한 백제가 한강 일대를 차지하였고, 이후에는 고구려가 한강을 차지한다. 진흥왕 때에 신라는 한강을 차지한다. 이처럼 한강 유역을 소유하면 나라가 번영했다는 것에서 한강이 한반도에서 지리·인구·외교 등에서 훌륭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한반도를 띠처럼 둘렀다는 뜻으로
[[고려]] 시대에는 한강 유역 대부분을 [[고려의 행정 구역#5도 양계|양광도]]가, 그리고 [[북한강]] 유역은 [[고려의 행정 구역#5도 양계|교주도]]가 관할했고, [[고려의 행정 구역#3경|지방 3경]] 중 하나인 [[서울특별시|남경]]과 [[목 (행정 구역)|12목]] 중 광주목·충주목·청주목이 있었다. 당시 한강은 물줄기가 맑게 뻗어 내린다 하여
고려가 멸망하고 건국된 [[조선]]은 한강 유역의 한양에 도읍을 정했다. 한양으로 천도한 이유는 한강의 수운 조건과 [[풍수지리설]]의 영향 그리고 정치적 배경 때문인데, 당시에 한강이 교통이 편리하고 지리적으로도 좋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양의 [[경창]]은 조세로 징수한 미곡과 포백을 운송하는 [[조운 (제도)|조운]]제도의 중심이 되었고, 9개의 [[조창 (기관)|조창]] 중에서 충주의 [[가흥창]]·원주의 [[흥원창]]·춘천의 [[소양강창]] 총 3개소가 한강 중류와 상류에 있었다. 한양 근처의 한강은
[[파일:Hangang Railway Bridge.jpg|섬네일|[[한강철교]]와 [[한강대교]]]]
조선 말에는 [[병인양요|프랑스]]와 [[신미양요|미국]]이 한강과 [[강화도]]에 침입했고, 개항을 한 후에는 [[증기선]]이 한강에서 운항하기도 하였다. [[1900년]]에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철교인 [[한강철교]]가 완공되었고, [[1916년]]에는 최초의 [[한강대교|인도교]]가 가설되었다. [[1912년]], [[1920년]], [[1925년]]에는 큰 홍수가 났었는데, 특히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한강 유역이 수몰되는 등의 큰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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