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폰 만슈타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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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슈타인은 1934년 2월 베를린으로 돌아와 대령으로 진급하고 제3군관구사령부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sfn|Melvin|2010|p=64}} 1935년 7월 1일 만슈타인은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육군 최고사령부]](OKH) 산하 육군장군참모 작전처 처장이 되었다.{{sfn|Melvin|2010|p=73}} 작전처장으로 재임하면서 만슈타인은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의 독일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방어작전인 [[적색 작전]]({{lang|de|Fall Rot}}) 수립에 참여하였다.{{sfn|Lemay|2010|p=51}} 또한 이 시기에 [[판처|전차]]({{lang|de|Panzer}})의 역할을 강조하며 전쟁의 과감한 변화를 주장하던 [[하인츠 구데리안]]과 [[오즈발트 루츠]]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육군장군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를 비롯한 고위 장교들은 그런 급격한 변화에 반대했고, 만슈타인은 보병을 직접 화력 지원할 수 있는 자주포대 개념의 [[돌격포]]({{lang|de|Sturmgeschütz; StuG}})의 개발을 대안으로 제안하였다.{{sfn|Melvin|2010|pp=79–82}} 결과적으로 돌격포는 2차대전 당시 가장 가격대비 효율이 뛰어난 무기 체계 중 하나로 활약했다.{{sfn|Forczyk|2010|p=9}}
 
만슈타인은 1936년 10월 소장으로 진급하며 별을 달았고, 베크 장군의 부관으로 제1상급설영장교({{lang|de|Oberquartiermeister I}}; 참모차장)이 되었다.{{sfn|Lemay|2010|p=43}} 1938년 2월 4일 만슈타인은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레그니차]]에 주둔한 [[제18보병사단 (독일 국방군)|제18보병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했다.{{sfn|Melvin|2010|p=100}} 그해 8월, 만슈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베크가 사임했다. 베크는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10월)이 너무 이르다고 판단했다. 만슈타인은 베크의 후임 참모총장이 되지 못했고, 그 자리는 만슈타인의 후임으로 참모차장 자리를 맡고 있던 [[프란츠 할더]]에게 돌아갔다. 이 일로 만슈타인은 할더에게 앙심을 품었다.{{sfn|Lemay|2010|pp=56–57, 62–63}} 1939년 4월 20일 만슈타인은 히틀러의 50회 생일 잔칫날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만슈타인은 히틀러가 하늘이 독일을 구하기 위하사 내려주신 지도자이며, 독일이 독일 인민의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적대적 세상”이 새로운 세계대전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면 썩 행복할 것이라는 둥의말을 소리를 지껄였다했다.{{sfn|Smelser|Davies|2008|p=97}}{{sfn|Kopp|2003|pp=471–534, 512}}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오메르 바르토브]]는 만슈타인을 비롯한 장교들의 부상은 [[나치즘]]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테크노크라시|기술관료적]] 장교들이 전면 부상하는 세태를 일부 드러냈다고 진단한다. 바르토브의 주장에 따르면 국방군은 나치 정권에서 독립적인 정치 중립적 조직이 아니었으며, 이미 [[독일 제3제국]]에 완전히 융합되어 있었다.{{sfn|Bartov|1999|p=145}}
 
== 제2차 세계 대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