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히로유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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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엔 [[반쇼시라베쇼]]의 교수가 되었고 이 시기부터 독일어를 공부했다. 1861년 첫 저작 토나리구사(『鄰草』, 1889년 간행)를 써서 서구의 입헌사상을 소개했다. 1864년 [[하타모토]]가 되어 [[카이세이쇼]]의 교수가 되었다. <ref>[[小川恭一]]編著 『[[寛政重修諸家譜|寛政譜]]以降 旗本家百科事典 第2巻』 [[東洋書林]]、1997年11月、832頁。</ref> 1868년엔 메츠케(目付)가 되었다. 1869년 신정부에서 일하게 되어 외무성에서 근무했다. 이 즈음 공의소에 자신의 생각을 적은 『非人穢多御廃止之儀』를 작성해 제출했다. 1870년 진정대의『真政大意』를 써서 [[천부인권]]론을 소개했다.
1872년 요한 블룬칠리(Johann Kaspar Bluntschli)의 저서인 국가학『国家学』을 강의한다. 이는 후에 국법범론『国法汎論』으로 번역출간되었다. 73년부터 [[메이로쿠샤]]에참가하여 민선의원 설립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74년에 국체신론『国体新論』을 발표했다. 77년에는 [[가이세이 학교]] 총장이 되었다. 81년에는 교육제도 개혁으로 구 도쿄대학 초대 총장이 되었다.
1882년 인권신설『人権新説』을 출간한다. [[사회 진화론]]의 입장에서 민권사상가들과 논쟁을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가토는 자신의 기존 입장을 버리고 사회진화론의 강력한 옹호자가 된다.86년에는 원로원 교수가 되었다. 90년에는 구 동경대학을 [[제국대학]]의 학제로 바꾸면서 동경제국대학의 2대 총장이 되었다. [[귀족원 (일본)]]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893년 강자의 권리와 경쟁『強者の権利の競争』을 내어 강권적인 [[국가주의]]를 주장한다. 이 책은 독일어판도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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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년|1895 년]] (메이지 28 년) 7 월, 궁중 고문관 .
* [[1898년|1898 년]] (메이지 31 년) : 고등 교육 회의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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