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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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신 교로 도르곤'''({{llang|mnc|{{MongolUnicode|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br />ᡩᠣᡵᡤᠣᠨ}}}}, {{한자|愛新覺羅多爾袞|애신각라다이곤}}, [[1612년]] [[11월 17일]] ~ [[1650년]] [[12월 31일]])은 [[청 제국]] 초기의 [[황족]]으로, [[후금]]의 초대 한이자 청 제국의 초대 황제로 여겨지는 [[누르가치]]의 14남이며, 누르가치의 세 번째 정실 [[효열무황후]] 아바하이의 소생이다. 작위는 '''[[예친왕 (도르곤)|예친왕]]'''(和碩睿親王, Hošoi Mergen Cin Wang)이며, [[시호]]는 충(忠), 정식 시호는 '''예충친왕'''(睿忠親王)이다.
청년 시절부터 이복형 홍타이지를 따라 여러 전쟁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그 공으로 친왕에 책봉되었고, [[팔기군]] 중 정백기와 양백기를 관장하였다. [[1643년]](숭덕 8년) 홍타이지가 급사하자, 조카이자 홍타이지의 장자 숙친왕 [[
이후 [[명나라]]가 멸망하고 입관(入關)하여 중원을 차지하였고, 청 제국의 중원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또다른 섭정왕이었던 정친왕 [[아이신기오로 지르갈랑|지르갈앙]]의 실권을 빼앗고, 경쟁자인
사후 황제로 추숭되어 묘호는 '''성종'''(成宗)이고 시호는 '''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懋德修遠廣業定功安民立政誠敬義皇帝)라 올려졌으나, 곧 친정을 개시한 순치제에 의해 묘호와 시호를 포함한 모든 명예를 추탈당하고 [[부관참시]]되었다. 그러나 사후 100년이 넘은 [[1778년]](건륭 43년)에 다시 복권되어 친왕의 작위와 시호를 추증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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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전쟁이 끝나자 청군은 조선인 포로와 인삼, 금 등의 공물과 공녀 수백여 명을 사로잡아 수도인 [[선양 시|묵던]]으로 귀환하였다.
[[1638년]](숭덕 3년) 8월, 홍타이지는 도르곤을 봉명대장군으로 삼고 군대를 몰아 [[명나라]]를 치게 하였다. 이 때, 홍타이지의 장자이자 도르곤보다 세 살이 많은 조카 버일러 [[
=== 숙질간의 황위 쟁탈 ===
[[파일:Mukden Palace 010.jpg|섬네일|left|220px|[[심양고궁]] 대정전(大政殿)의 옥좌. 예전에는 독공전(篤恭殿)으로 불리었으며 순치제는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1643년]](숭덕 8년) [[9월 21일]], 홍타이지는 아무런 유조도 남기지 않은 채 52세의 나이로 급사하였다. 홍타이지는 생전에 아무런 후계자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은 큰 파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홍타이지 사후 5일 후에 당시 황족 중 가장 서열이 높았던 누르하치의 차남이자 도르곤의 이복형 예친왕(禮親王) [[다이샨]]은 [[선양 고궁|성경 황궁]]의 숭정전(崇政殿)에서 [[의정왕대신회의]]를 소집하여 다음 황위에 대해 논의하였다.<ref>{{저널 인용|저자=조재덕|날짜=1997|제목=순치시기 중앙권력의 성격 - 팔기왕공의 권력투쟁을 중심으로|저널=동양학연구|권=3|쪽=171|확인날짜=2013-12-27}}</ref> 이 중 도르곤과 도르곤의 조카이자 홍타이지의 장남인 숙친왕 [[
|언어=zh
|저자=옌총니엔(閻崇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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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그러나 도중 다이샨의 아들인 패륵 시오토와 다이샨의 손자인 영군왕 아다리가 몰래 도르곤을 황위에 앉히려 도모하였다가 발각되었다. 이에 의정왕대신회의에서 도르곤을 의심하기 시작하자, 도르곤은 이 사건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항변하고 둘을 바로 참형에 처한 후 자신이 황위에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ref>《[[청사고]]》 열전제3권, 제왕2.</ref> 그리하여 그는
=== 명나라의 멸망과 청군의 입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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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l=http://books.google.com/?id=8nXLwSG2O8AC&printsec=frontcover#v=onepage&q&f=false
|isbn=0-520-04804-0
|page=299}}</ref> 순치제가 즉위한 이듬해인 [[1644년]](순치 원년) 4월, 숙친왕
같은 해,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명나라는 이미 틈왕(闖王)을 자처한 [[이자성]]의 농민군에 의해 세력을 급격히 잃어갔고 이자성군은 수도인 북경에 다다르고 있었다. [[1644년]](순치 원년, 명 숭정 17년) [[4월 21일]] 이자성의 군대는 북경성에 공격을 가하였고 그 다음날,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자금성 뒤의 후원인 매산에서 목을 매 자진하였다.<ref>{{서적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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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곤이 죽고 난 후 도르곤을 추종하던 신료들은 순치제에게 상소를 올려 황부섭정왕 도르곤을 황제에 추숭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도르곤이 죽었으나 명목상으론 여전히 실권이 없던 순치제였기에 그 주장에 따랐고 결국 순치제는 도르곤이 사망한지 며칠 후 도르곤에게 성종(成宗)의 묘호와 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懋德修遠廣業定功安民立政誠敬義皇帝)의 시호를 올려 황제에 추숭하였으며 그의 장례를 국상으로 치루었다. 그러나 도르곤의 국상을 치루고 한달 반 후, 도르곤의 수하에 있던 정백기와 양백기의 장군들이 도르곤의 형인 영친왕 아지거를 새로이 섭정왕으로 모시고 자신들은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려 도모했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사건은 도르곤에 의해 실각되었던 정군왕 지르갈랑에게 호기가 되었으며 곧 도르곤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대신들과 팔기군의 장수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아지거는 이에 자진하였고 역모에 관련되어 있던 정백기와 양백기의 장수는 모두 처형되었다. [[1651년]](순치 8년) [[2월 1일]], 지르하란은 친왕의 작위를 회복함과 동시에 순치제에게 대권을 봉환하였고, 14살의 순치제는 그날로 친정을 개시하였다.<ref name="청사고4"/>
얼마 후, 지르하란은 순치제에게 도르곤이 섭정왕으로서 전횡을 휘두르고, 황제만 입을 수 있는 황포를 수시로 입었으며, 또한 순치제의 이복형인
|url=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qa_10202018_003&tabid=k
|저자=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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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韃靼漂流記〉,〈清史研究集〉第一輯
|page=378
}}</ref> 《[[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에서는 정친왕 지르갈랑이 순치제에게 아뢰기를 도르곤이 숙부로서 맹세를 어기고 권력을 자행하고 스스로 황제의 아버지를 자처하는 등 도를 넘은 전횡을 휘둘렀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숙친왕
|url=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qa_10203017_003&tabid=k
|저자=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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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복진 보르지기트씨 - 이름 찰이망(紮爾莽). 찰로특부 태길 근두이(紮魯特部 台吉 根杜爾)의 딸.
* 계복진 보르지기트씨 - 커얼친 태길 납포희서(拉布希西)의 딸
* 계복진 보르지기트씨 - 커얼친 태길 색낙포(索諾布)의 딸, 숙친왕
* 계실 대복진 이씨 (繼福晉 李氏, [[1635년]] ~ [[1662년]]) - [[조선]] 출신, 종실 금림군 이개윤(錦林君 李愷胤)의 딸, [[의순공주]](義順公主).
* [[측복진]] 궁기트씨(側福晉 公齊特氏): 차하르 태길 포연도(布延圖)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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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신기오로 다이샨|다이샨]]
* [[아이신기오로 도도|도도]]
* [[아이신기오로
{{Col-2}}
* [[아이신기오로 지르갈랑|지르갈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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