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인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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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15.03.19}}</ref>는 한편 보수 언론에서는 선전용 교화소 발언으로 북한 당국에 밉보여 외롭게 죽었다고 주장한다. 송환 당시에 이미 폐렴을 앓아 휠체어 신세였던 리인모는 2003년 9월 이후부터 사망한 2007년 6월 16일까지의 행적을 언론에서 이름을 찾기가 힘들다. 그 이유가 투병과 노쇠함 때문인지 북한 당국에 밉보였기 때문인지 불명확하다. 식물인간 상태라는 리인모가 북송 후 10년째 살고 있어 놀랐다는 한완상의 2003년 증언은 인상적이다.
 
리인모가 북한 당국에 밉보였다고 거론되는 게 교화소, 즉 수형시설에서의 발언이다발언 때문이다. 리인모와 수형시설 관련 내용이 처음 등장하는 2006년 데일리NK 기사와 2008년 나온 리준하의 책 '교화소 이야기'에는 수형시설을 둘러본 리인모가 김정일(또는 중앙당)에게 개선을 건의(또는 보고)했으며 실제로도 수형 여건이 개선되고 수형자 대우가 달라졌다고 나온다. 그러나 2009년 주간조선부터는 리인모가 문제의 교화소 발언으로 대우가 달라져 불이익을 당하는 식의 기사가 나온다. 2017년 조선펍 기사에 이르러서는 리인모의 폭탄발언을 전해들은 김정일이 화를 내었다고 나온다. 이같은이 같은 부분은 초창기 기사에는 등장하지 않은 것이며 주간조선 기사 이후에 등장하고 발언 내용도 약간씩 다르게 나타난다.
 
2006년 1월 15일 데일리NK는 리인모로 인해 2002년부터 북한 수형시설의 인권 실태가 개선된 적이 있다고 중국에 체류 중인 탈북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미래한국이 2006년 1월 16일 이를 전재했다. 이 기사에는 문제의 발언 내용은 없지만 리인모의 건의를 받은 북한 당국의 반응은조치는 굉장히 긍정적이다. 북한으로 송환된 후 리인모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를 둘러봤으며 그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직접 제기해 북한 수형시설의 인권실태가 한때 개선됐다는 것이다. 리인모가 북한의 감옥을 둘러보게 된 이유는 본인의 희망에 의해서였으며, 2001년 말 평안남도 평성 교화소와 함경북도 회령 교화소, 평안북도 증산군 11호 단련대,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은 정치범 종신 수용소 등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인모의 건의 후에 교화소 내에 구타가 사라지기도 하고 2002년에는 대사면 조치가 내려져 수형자 절반이 출소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는 2005년 11월 국가정보원이 국회 정보위에 제출한 자료 ‘북한의 인권개선 노력’을 통해 확인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ref>{{저널 인용
|url=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817&replyAll=&reply_sc_order_by=I#reply
|제목=북송 장기수 이인모가 북한인권개선 위해 노력?
|출판사 = 미래한국
|날짜=2006.01.16}}</ref> 이것은 리인모가 교화소 관계자 앞에서 폭탄발언을 한 게 아니라 정식 계통을 밟아서 김정일에게 건의했고 그게 받아들옂ㅆ다는 것이다. 이 건의로 리인모가 불이익을 받은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날짜=2006.01.16}}</ref>
 
2008년 5월 6일 도서출판 시대정신이 펴낸 재중 탈북자 리준하의 책 ‘교화소 이야기’에 리인모와 교화소 관련 내용이 나온다. 책에는 교화소에서 도주자 총살이 없어졌다. 도주자는 사형이 아니라 형기가 늘어났는데 그게 리인모 덕분이라고 밝힌다. 한국에서 34년간 감옥 생활을 하다가 조선(북한)으로 돌아왔는데, 몇 개의 교화소를 돌아보고는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곳에서는 34년이 아니라 3년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중앙당에 보고했다고 한다. 그의 보고 덕분에 그때부터 전거리 교화소에서 사형당한 도주자는 없었다(책 p. 145)는 것이다. <ref>{{저널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