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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인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언론인

리인모[1](李仁模, 표준어: 이인모, 1917년 8월 24일 ~ 2007년 6월 16일)는 조선인민군 언론인이다. 종군기자 출신으로, 남한에서 34년간 비전향 장기수로 있다가 석방된 후 1993년 3월 19일 최초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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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인모
출생 1917년
일제강점기 조선 함경남도 풍산군
사망 2007년 6월 16일
국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특이사항 비전향 장기수
현황 1993년 3월 19일 비전향 장기수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
체포일자 1952년

생애편집

1917년 8월 24일 함경남도 풍산군 개마고원 지대에서 화전민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일본 도쿄공업고등학교에 다니다 중퇴했을 정도로 인텔리였다. 선배 및 친구들과 함께 항일운동에 뛰어든 후 스물한 살 때 서울로 옮겨 활동하다 45년 6월 일제의 탄압에 산속으로 피신한 후 해방을 맞는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 풍산, 흥남 지역에서 조선노동당 지역 선전국장으로 활동하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다. 전쟁 중 인민군 문화부 소속 종군기자가 되어 전선을 따라 낙동강 유역까지 내려왔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후퇴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 유격대의 신문을 발행하는 일을 하였다. 경남도당 선전부장 대리로 일하다가 52년 지리산 대성골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돼 광주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당시 36세였다. 이후 34년간 복역하면서 전향을 거부하여 비전향장기수가 되었다. [1]

한국전쟁 당시 그의 역할을 두고 대한민국의 재판 기록은 의용군 강제 모집이나 빨치산 활동으로 적시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종군기자로서 전선 취재를 담당한 것으로 주장해 상충한다.

1952년 검거되어 7년간 복역했고 1959년 출소했지만 1961년 6월 부산에서 지하당 활동 혐의로 붙잡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76년 만기가 지났지만 사회안전법에 의한 보호감호 처분으로 88년 10월까지 복역했다.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출소한 후 그는 양아들 김상원의 경남 김해 집에서 생활했다.[2]

출소 후 많은 글을 써서 비전향장기수의 존재를 국내외에 널리 알려 안재구, 류낙진, 최호경 등 조직 사건 관련자와 손성모, 신광수 등 비전향장기수가 1999년 12월 31일까지 모두 석방되는 등 한국 정부의 인권 개선에 기여했다. 송환 문제가 불거진 것도 1989년 월간 말지에 북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는 수기 '내 청춘 통일에 묻어'를 연재하면서부터다. 이게 1991년 9월 21일자 북한 노동신문에 실리면서 북한은 1991년 9월 대남방송인 평양방송을 통해 리인모의 송환을 요구한다. 두 달 뒤 서울에서 열린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12월 10~13일)을 취재하러 내려온 북한 중앙방송 기자가 부인 김순임씨와 외동딸 현옥씨 등 북녘 가족의 답장과 사진을 남측 취재진에 전해왔다. 이후 북한은 1992년 '남북고위급회담' 등에서 이를 줄기차게 송환을 요구했다.

마침내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3월 1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가족 방문'이라는 명분으로 리인모의 방북을 허용(송환)했다. 리인모는 폐렴으로 입원 중이던 부산대병원에서 경찰헬기 편으로 판문점에 도착했다.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에서 대기하고 있던 북한 가족들, 부인 김순임씨와 딸 현옥씨, 그리고 외손주들과 만난 후 휠체어에 의지한 채 북으로 향했다.[3] 북한은 판문점을 거쳐 평양 도착까지의 리인모 송환 실황중계를 반복 보도한 가운데 이를 '김일성.김정일의 은덕'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승리' 등으로 표현하며 대대적인 선전공세를 펼쳤다.[4]

그의 북송은 1992년 7.7선언 4주년을 맞아 남북 간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 이산가족 희망지역 정착 제의에 따라 이뤄졌다. 정부는 리인모가 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점을 감안해 '장기방북' 형식을 취했고 그의 주민등록증을 회수하기도 했다.[5] 김영삼은 퇴임 후 인터뷰에서 리인모를 조건없이 북한에 보내게 된 것이 자신의 결단이었음을 밝혔다. [6] 그는 1993년 3월 9일 각 언론사 편집·보도국장을 청와대 만찬에 초청한 자리에서 기사거리로 "선물을 주겠다"며 리인모 북송 방침을 밝혔다. 정부와 청와대 참모들과 한마디 협의 없이 민감한 사안을 불쑥 터뜨렸다.[7] 북한이 리인모 송환을 요구할 때마다 정부는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등의 조건을 내세워 거부해왔는데 취임 12일째인 김영삼이 느닷없이 "그냥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보내줄 것"이라고 발표해버린 것이다.

송환 후 리인모는 한국전쟁 전 혼인했던 부인과 딸과 함께 생활했다. 북한은 고위층이 사는 서장동에 단독주택을 마련해 주고 주치의가 딸리고 몸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프로젝트도 진행했다고 한다. 96년 5월 말부터 6월 초 사이 미국에서 신병치료를 받기도 했다.[8] 2001년 8월 19일 `2001년 민족통일대축전' 남측 대표단에 포함돼 방북한 양아들 김상원과 8년 5개월 만에 만났다.[9] 2002년 6월엔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통일대회 행사 때 남측 딸을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만났다고 알려졌다.[10] 2003년 9월 24일 식물인간 상태라는 리인모를 만난 한완상은 1993년 북송 당시 시한부 판정을 받았는데 10년째 살고 있어서 놀랐다고 밝혔다. 한완상은 송환 당시 통일부총리였다. [11]

리인모는 2007년 6월 16일 89세로 사망, 인민장으로 치러져 평양의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12] [13] 북한은 방송을 통해 “전 조선인민군 종군기자이고 비전향 장기수인 리인모 동지가 남조선의 감옥에서 당한 고문의 후과(후유증)로 애석하게 서거했다”고 밝혔다.[14] 부인 김순임이 2015년 1월 12일 사망하자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는 등 장례식을 대대적으로 치렀다. [15]

리인모는 비전향장기수 첫 송환자로서 북한에서 줄곧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신념과 의지의 화신' '통일의 영웅' 등으로 일컬어졌다. `체제 및 정치선전'에 더할 수 없는 좋은 소재였던 것이다. 김일성은 송환 직후인 4월 15일 자신의 생일에 입원 중인 리인모를 찾아 격려하고 노동당 당원증을 수여했다. '김일성 훈장' '영웅칭호' '국기훈장 1급'도 수여됐다. 문필활동의 공로로 북한 문필가·언론인들에게 주어지는 `3·1월간상'을 수상했고 또 통일부문 인사들이 영예로 생각하는 `조국통일상'도 받았다.[16]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소설 '93년 3월19일'(저자 한웅빈)이 95년 발간됐고, 다부작 영화 '민족과 운명'(제11~13부)이 만들어졌다. 가요와 기념 우편엽서, 우표도 나왔다. 2008년 평양 통일거리에는 동상이 건립되기도 했다. 량강도 김형직군에 있는 모교인 파발인민학교는 '리인모 인민학교'로 이름을 바꿔달았다. [17] [18] [19] [20]

논란편집

리인모의 말년에 관해 논란이 있다. 2007년 89세로 사망할 때까지 최고의 예우를 받았으며 죽은 후에도 '신념과 의지의 전형인 불굴의 통일애국투사'라고 칭송받[21]는 한편 보수 언론에서는 선전용 교화소 발언으로 북한 당국에 밉보여 외롭게 죽었다고 주장한다. 송환 당시에 이미 폐렴을 앓아 휠체어 신세였던 리인모는 2003년 9월 이후부터 사망한 2007년 6월 16일까지의 행적을 언론에서 이름을 찾기가 힘들다. 그 이유가 투병과 노쇠함 때문인지 북한 당국에 밉보였기 때문인지 불명확하다.

리인모가 북한 당국에 밉보였다고 거론되는 게 교화소, 즉 수형시설에서의 발언 때문이다. 문제의 발언은 2008년 펴낸 리준하의 책 ‘교화소 이야기'에 처음 등장하며 열악한 환경의 교화소에서 "3년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나온다. 리인모와 수형시설 관련 내용이 처음 등장하는 2006년 데일리NK 기사와 2008년 나온 리준하의 책 '교화소 이야기'에는 수형시설을 둘러본 리인모가 김정일(또는 중앙당)에게 개선을 건의(또는 보고)했으며 실제로도 수형 여건이 개선되고 수형자 대우가 달라졌다고 나온다.

그러나 2009년 주간조선 기사부터는 문제의 교화소 발언으로 리인모가 불이익을 당하는 식의 내용이 나온다. 이는 초창기 기사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고 불이익받은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다. 특히 발언 내용도 3년, 1년, 한 달 등 다르게 나타났는데 이는 결국 확실한 근거가 있다기보다 글을 쓰면서 남의 주장이나 글을 인용한 결과로 보인다. 2017년 조선펍 기사에 이르러서는 리인모의 폭탄발언을 전해들은 김정일이 화를 내었다고 나온다. 조선펍에 칼럼을 쓴 김태산은 문제의 발언이 있던 당시 체코에 있었다. 2001년 문제의 발언이 있었고 리인모가 북한 당국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했다면 2002년 이후 나타난 북한 교화소 변화를 설명할 길이 없다. 또 리인모가 2002년 6월엔 금강산에서 남측 딸을 만나고 2003년 9월 24일 자신의 집을 방문한 한완상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송환 당시 통일부총리였던 한완상은 이날 식물인간 상태라는 리인모를 찾아보고 북송 후 10년째 살고 있어 놀랐다고 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2005년 11월 국가정보원이 국회 정보위에 제출한 자료 ‘북한의 인권개선 노력'을 통해 밝힌 내용이나 2006년 데일리NK 기사, 2008년 리준하의 책 ‘교화소 이야기'를 봐도 북한 당국이나 김정일이 리인모의 건의에 화났거나 푸대접했다는 부분은 없다. 더구나 리인모가 송환되기 전부터 폐렴을 앓아 휠체어 신세였고 나이가 많았음을 고려하면 2007년 6월 16일 죽기까지 오랫동안 병석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2006년 1월 15일 데일리NK는 리인모로 인해 2002년부터 북한 수형시설의 인권실태가 한때 개선된 적이 있다고 중국에 체류 중인 복수의 탈북자들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2004년 4월부터 2005년 3월까지 함경남도 영광군에 위치한 55호 단련대(구 '22호 교화소')에 수감되어 있다 2005년 11월 다시 북한을 탈출한 박철군 씨는 “리인모가 북한의 감옥들을 둘러보고 ‘북조선의 감옥은 너무 세다, 남조선도 이렇게 험악하지는 않다'고 김정일에게 제기를 했으며, 그 때문에 2002년부터 감옥 사정이 약간 나아졌다"고 2006년 1월 13일 기자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미래한국이 2006년 1월 16일 이를 전재했다.

북한으로 송환된 후 리인모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를 둘러봤으며 그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직접 제기해 북한 수형시설의 인권실태가 한때 개선됐다는 것이다. 리인모가 북한의 감옥을 둘러보게 된 이유는 본인의 희망에 의해서였으며, 2001년 말 평안남도 평성 교화소와 함경북도 회령 교화소, 평안북도 증산군 11호 단련대,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은 정치범 종신 수용소 등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인모의 건의 후에 교화소 내에 구타가 사라지기도 하고 2002년에는 대사면 조치가 내려져 수형자 절반이 출소하기도 했고 "그때 '리인모 만세'를 외친 사람이 있다는 우스개거리가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는 국가정보원이 2005년 11월 국회 정보위에 제출한 자료 ‘북한의 인권개선 노력'을 통해 "김정일 위원장이 지난 2003년 9월 인민보안성 및 보위부에 '고문 등 폭력행위를 일체 근절하고 앞으로 법에 따라 주민을 다루라'는 내용의 지침을 하달했다"고 밝힌 바 있다. [22]는 것이다. 이 기사에는 문제의 발언 내용은 없지만 리인모의 건의를 받은 북한 당국의 조치는 굉장히 긍정적이다. 이것은 리인모가 교화소 관계자 앞에서 폭탄발언을 한 게 아니라 정식 계통을 밟아서 김정일에게 건의했고 그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이 건의로 리인모가 불이익을 받은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2008년 5월 6일 도서출판 시대정신이 펴낸 재중 탈북자 리준하의 책 ‘교화소 이야기'[23]에 리인모와 교화소 관련 내용이 나온다. 책 2부 중 '탈주자에 대한 공개총살' 부분에는 교화소에서 도주자 총살이 없어졌다. 도주자는 사형이 아니라 형기가 늘어났는데 그게 리인모 덕분이라고 밝힌다. 리인모는 한국에서 34년간 감옥 생활을 하다가 조선(북한)으로 돌아왔는데, 몇 개의 교화소를 돌아보고는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곳에서는 34년이 아니라 3년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중앙당에 보고했다고 한다. 그의 보고 덕분에 그때부터 전거리 교화소에서 사형당한 도주자는 없었다(책 p. 145)는 것이다. [24] [25] 이 책은 북한 일반 교화소의 실상을 최초로 밝힌 책이다. 문제의 발언이 처음 등장하며 주간조선 이후 인용되는 발언은 여기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간조선 기사와 달리 북한 당국이 리인모의 보고를 받고 수형자 대우를 개선한 모습을 담고 있다.

2009년 6월 23일 주간조선은 리인모가 선전용 감옥을 둘러본 뒤 “이런 감옥에선 단 1년도 살 수 없다”고 발언한 후 모든 선전활동이 중단된 채 고립돼 외롭게 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26]고 보도했다. 리준하의 책 ‘교화소 이야기' 내용과 달리 리인모가 문제의 교화소 발언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내용이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새로운 사실을 ~알려졌다로 표현하면서 주장의 근거는 밝히지 않았다. 리인모의 발언 내용 중 3년이 여기서는 1년으로 나온다. 수형시설 개선 건의 내용은 없다.

데일리NK의 2009년 10월 7일 기사 "도주자의 말로 어떻게 되는지 똑바로 보라"는 리준하의 ‘교화소 이야기’ 책 2부 중 '탈주자에 대한 공개총살' 부분(p. 140~146)을 전재한 것이다. 리인모와 교화소 관련 내용은 책과 같다. [27]

데일리NK는 2010년 3월 19일 기사에서 북한 정권의 융숭한 대접은 리인모의 언행 한마디에 중단됐다는 주장도 있다고 밝힌다. 리인모가 북한의 교화소를 둘러보고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곳에서는 34년이 아니라 3년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진 후 그를 활용한 모든 선전활동이 중단됐고 이후 그는 사회와 고립돼 외롭게 연명하다 2007년 6월 생을 마쳤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아직 공식 확인되지는 않았다[28]는 것이다. 문제의 발언이 등장하지만 건의라는 형식이 없고 리인모가 북한당국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정보를 인용하면서도 출처도 없고 정보 내용이 확인되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문제의 교화소 발언 이후 전개되는 상황이 2006년 1월 15일, 2009년 10월 7일 기사와 상반된다. 그것도 2001~2002년 무렵 리인모가 했다는 발언의 결과가 불과 5개월 사이에 정반대로 나타난다.

2011년 2월 7일 뉴데일리에는 남한에서 36년 옥살이를 한 비전향좌익수 이인모가 북한에서 로동교화소를 돌아본 뒤 “나 같으면 한 달 안에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29]는 기사가 실렸다. 역시 출처의 근거는 밝히지 않았다. 여기는 3년이 아니라 한 달로 나온다. 북한당국의 반응과 리인모의 불이익당하는 내용은 없다.

2013년 뉴스파인드는 칼럼에서 리인모가 선전용 교화소를 둘러보고 나서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곳에서는 34년이 아니라 3년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진 후 그를 활용한 모든 선전활동이 중단됐고 이후 그는 사회와 고립돼 외롭게 연명하다 2007년 6월 생을 마쳤다는 주장도 있다[30]고 주장했다. 주장의 근거를 밝히지 않았고 수형시설 개선 건의 내용은 없으며 리인모가 문제의 발언으로 불이익을 받았다는 주장을 실었다.

2015년 3월 13일 동아일보는 탈북자 김미란의 증언 기사에서 증산교화소에 이인모가 와서 이 교화소에서는 일년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란 말을 한 다음부터 이인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31] 고 기록하고 있다. 주장은 근거는 없다. 여기는 3년이 아니라 1년으로 돼 있고 리인모가 북한당국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특히 2017년 전 조선-체코 신발 합영회사 사장 김태산이 쓴 조선펍 글에는 기존의 자료에는 보이지 않던 내용이 등장한다. “국제교화소”를 돌아본 리인모가 북한을 통째로 뒤흔들어 버리는 핵폭탄 발언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곳이었다면 34년은 고사하고 3년도 견디어내지 못 했을 거야.” 그 순간부터 30분도 채 되기 전에 노동당과 안전보위부, 인민보안성, 3개의 통보선으로 이인모의 교화소 행적과 발언 내용이 김정일에게 직보 되었고 김정일은 분노했다는 것이다. “역시 자유를 맛본 자들은 믿을게 못 돼” 그때부터 이인모는 “당과 수령의 신임을 저버린 쓸모없는 고깃덩이” 취급을 받았고 마침내 2007년 6월 누구도 찾지 않는 속에서 고독한 생을 마쳤다[32]는 것이다. 여기서는 리인모가 김정일에게 건의한 게 아니라 행정계통 등으로 직보받은 김정일이 분노했다고 나온다. 그 때문에 리인모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고 외롭게 죽는다고 나온다. 역시 주장의 근거는 없다. 심지어 해당 글 끝에는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라고 되어 있다. 또 김태산은 문제의 발언이 있던 시기에 체코에 있었기에 직접 본 일일 수가 없다. 북한 경공업성 관료를 지낸 김태산은 2000년 7월부터 체코공화국에서 북한-체코 신발기술합작회사 북한측 사장으로 일했다. 2002년 9월 8일 체코에서 탈출해 독일을 거쳐 한국으로 망명했다. [33]

2018년 8월 20일 블루투데이는 이인모가 대외 선전용으로 화려하게 지어진 ‘특별 교화소'를 보고도 “이런 데선 1년도 살 수 없다"고 발언했다가 모든 지원이 끊기고 2007년 혼자 생을 마감한다[34]고 주장한다. 역시 근거는 없다. 여기는 3년이 아니라 1년으로 돼 있고 리인모가 북한당국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참고자료편집

연관 항목편집

각주편집

  1. “남북정상회담 앞두고 생각나는 이름, 이인모 선생”. 오마이뉴스. 2018.03.13. 
  2. “‘북으로 간 양아버지 리인모 선생 묘소에 가고 싶다더니…’”. 오마이뉴스. 2015.10.15. 
  3. “[사진으로 보는 이주일의 소사] <129>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북한 송환”. 한국일보. 2014.03.17. 
  4. “北韓,李仁模씨 송환후 대대적 선전 공세”. 연합뉴스. 1993.03.20. 
  5. “사망한 비전향장기수 리인모씨는 누구”. 연합뉴스. 2007.06.17. 
  6. "나는 이래서 전두환.노태우를 감옥에 보냈다". 연합뉴스. 2007.11.29. 
  7. “[박관용 회고록] 대통령 홀로 뛰는 것은 위험천만”. 시사저널. 2016.05.12. 
  8. “외국서 신병치료한 북한 고위 인물들”. 연합뉴스. 2001.08.15. 
  9. “북송 리인모씨, 방북 양아들 만나”. 2001.08.20. 2012.12.18. 
  10. “비전향 장기수 北送, 그 후 2년”. 2002.09.02. 2012.12.18. 
  11. “[길을 찾아서] 북한 딸집서 10년째 생존한 리인모 노인”. 한겨레. 2012.12.18. 
  12. 《중앙일보》 (2007.7.10) 한국 언론이 처음 가 본 북한 '열사릉' 〈하〉
  13. “북송 비전향장기수 리인모씨 사망”. 연합뉴스. 2007.06.17. 
  14. “북한이 4년 전 발간한 《통일대박론 무엇이 문제인가》 분석해 보니”. 월간조선. 2018.12.20. 
  15. “북한, 첫 북송 비전향 장기수 아내 띄우기 나서”. 연합뉴스. 2015.01.12. 
  16. “이인모씨의 바쁜 북한 생활”. 연합뉴스. 1999.02.24. 
  17. “비전향 장기수 부인도 영웅 대접…북한의 속셈”. sbs. 2015.01.18. 
  18. “北의 비전향장기수 평가와 대우”. 연합뉴스. 2005.10.02. 
  19. “북송 비전향장기수 '특별' 대우”. 연합뉴스. 2007.06.17. 
  20.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 사망”. 경향신문. 2007.06.17. 
  21. “북한, 비전향장기수 리인모 띄우기.."불굴의 혁명전사". 연합뉴스. 2015.03.19. 
  22. “북송 장기수 이인모가 북한인권개선 위해 노력?”. 미래한국(데일리NK 인용). 2006.01.16. 
  23. “교화소 이야기-최초로 밝혀지는 일반 교화소의 실상”. 시대정신. 2008.05.06. 
  24. “北 교도소 실태 최초 고발한 ‘교화소 이야기’”. 데일리NK. 2008.05.07. 
  25. “재중 탈북자가 전하는 北 '감옥' 실상”. 연합뉴스. 2008.05.27. 
  26. 《주간조선》 (2009.6.23) 억류 여기자 수감 북한 교화소는 어떤 곳
  27. ““도주자의 말로 어떻게 되는지 똑바로 보라””. 데일리NK. 2009.10.07. 
  28. “이인모는 송환 후에도 金부자에 충성다짐했을까?”. 데일리NK. 2010.03.19. 
  29. “이곳이 수용소”. 뉴데일리. 2011년 2월 7일. 
  30. 《뉴스파인더》 (2013.3.18) 북송됐던 리인모, 과연 행복했을까
  31. ““지옥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동아일보. 2015.03.13. 
  32. “북송된 미전향장기수 이인모가 "쓸모없는 고깃덩이"로 버려진 이유는?”. 조선펍. 2017년 9월 1일. 
  33. “[림일 작가의 통일인터뷰] -김태산 전 조선체코신발회사 사장”. 오도민신문. 2017.05.23. 
  34. “대부분의 `비전향 장기수`가 남파공작원 출신, 양심수로 끊임없이 미화”. 블루투데이. 2018.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