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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扶餘,夫餘, 기원전 1043년 ~ [[494년]])는 [[한국]]의 [[고대]][[국가]]인 초기 국가([[연맹 왕국]])들 중 하나로, 지금의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만주]] 일대([[하얼빈]], [[아청]], [[위수 (창춘)|위수]], [[눙안]], [[창춘]], [[솽양]], [[지린]], [[옌지]], [[훈춘]], [[치치하얼]], [[룽장]])를 지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부여는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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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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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호 ===
부여에 대한 국호의 한자 표기는 夫餘, 扶餘, 扶余, 夫余로 쓰인다. 중국의 문헌에서는 夫餘로, 한국의 문헌에서는 扶餘로 표기되고 있다. 부여란 명칭은 (神明)에서 유래하여 개발(開發)->자만(滋蔓)->평야(平野)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로 변하였다는 설<ref>[[최남선]](崔南善), 《[[:s:아시조선|아시조선]](兒時朝鮮)》(1926)( 《六堂崔南善全集》2, 1973 중에서) 〈第四章[제사장] 朝鮮[조선] 사람의 줄거리〉“ 「」은 神明[신명]의 原義[원의]로부터轉滋[전자]하여 開發[개발]·滋蔓[자만]·光明[광명]의 義[의]를 가지게 된 말이며, 후에 漢字[한자]로 譯[역]하여 「貊[맥]」「發[발]」「夫里[부리]」등을 作[작]하고, 다시 訛[와]하고 略[략]되어 「番[번]」「方[방]」「夫餘[부여]」등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ref>과 《[[자치통감]]》의 “初,夫餘居於鹿山,”(처음에 부여는 녹산에 자리잡았다.)<ref>[[사마광]](1084년),《[[자치통감]]》〈[[:s:zh:資治通鑑/卷097|卷097]]〉 “初,夫餘居於鹿山,”(처음에 부여는 녹산에 자리잡았다.)</ref>라는 기술에서의 “鹿山”과 사슴[鹿]을 [[만주어]]에서 Puhu, [[몽골어]]에서 [[:wikt:буга|буга]](buga)라고 하는 것을 근거로 夫餘를 사슴의 뜻을 가졌다고 하는 설<ref>[[시라토리 구라키치]], 「濊貊民族の由來を述べて, 夫餘高句麗及び百濟の起源に及ぶ」 『白鳥庫吉全集』 3卷, 1970, 岩波書店. p.516</ref>이 있는데 ‘벌’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현재로서는 그 어원의 정확한 추정은 어려우나 평야를 의미하는 부리(夫里) 등과 동음동의어(同音同義語)로 夫餘의 국가적 위치와 관련된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ref>이병도 ,〈부여고(夫餘考)〉《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1976) 226쪽</ref>《[[산해경]]》의 “有胡‘不與’之國” (오랑캐의 나라인 ‘부여’가 있어...)<ref> 《[[산해경]]》 〈[[:zh:s:山海經/大荒北經#大荒北經]]〉, “有胡不與之國” (오랑캐의 나라인 부여가 있어...)</ref>과 관련하여 예(濊)의 한음(漢音) huì(‘후이’)에서 夫餘의 명칭이 기원했다는 설(說)<ref>리지린, 『고조선연구』1964, 사회과학원출판사</ref>도 있으나, 이는 아직 단정할 수 없는 문제이다.<ref> 李基白·李基東 共著,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一潮閣. p.77</ref><ref>{{웹 인용 | url =http://db.history.go.kr/front2010/dirservice/JO/viewJuJO.jsp?pPageLevel=6&pLevel=5&pType=T&pDatabaseID=jo_004_001&pRecordID=jo_004_001c_02_002 | 제목 =중국정사조선전 주석보기 > 중국정사조선전 주석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nowiki> [註002] </nowiki> 夫餘 | 출판사 =국사편찬위원회 | 인용문 =여기서의 夫餘는 北夫餘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北夫餘는 韓國史에서 古朝鮮 다음으로 등장하는 국가로 中國文獻에는 夫餘로, 國內文獻에는 扶餘로 표기되고 있다. ① 夫餘란 명칭은 (神明)에서 유래하여 開發->滋蔓->平野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로 변하였다는 說과(崔南善,『兒時朝鮮』p.158), 『資治通鑑』에 나오는 ‘初夫餘居于鹿山’의 鹿山과 만주어에서 사슴(鹿)을 Puhu, 몽고어에서 Pobgo라고 하는 것을 근거로 夫餘를 사슴의 뜻이라고 하는 說이 있는데(白鳥庫吉,「濊貊民族の由來を述べて, 夫餘高句麗及び百濟の起源に及ぶ」p.516), ‘벌’에서 유래되었다는 說이 유력하다. 현재로서는 그 어원의 정확한 추정은 어려우나 平野를 의미하는 夫里 등과 同音同義語로 夫餘의 국가적 위치와 관련된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李丙燾,「夫餘考」p.226)『山海經』의 ‘有胡不與之國’과 관련하여 濊의 漢音 ‘후이’에서 夫餘의 명칭이 기원했다는 說도 있으나(리지린,『고조선연구』), 이는 아직 단정할 수 없는 문제이다. ... ≪參考文獻≫ 『山海經』第17「大荒北經」 崔南善, 『兒時朝鮮』1926(『六堂崔南善全集』2, 1973) 李丙燾, 「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리지린, 『고조선연구』1964, 사회과학원출판사. 白鳥庫吉, 「濊貊民族の由來を述べて, 夫餘高句麗及び百濟の起源に及ぶ」『白鳥庫吉全集』 3卷, 1970, 岩波書店. }}{{깨진 링크|url=http://db.history.go.kr/front2010/dirservice/JO/viewJuJO.jsp?pPageLevel=6&pLevel=5&pType=T&pDatabaseID=jo_004_001&pRecordID=jo_004_001c_02_002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