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왕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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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환 (토론 | 기여)
잔글 장화왕후의 조부 이름은 純(순)인데 敦(돈)으로 잘못 읽어졌음을 바로잡고, 고려 제2대 혜종 사후 집권한 세력에 의하여 장화왕후 가문과 혜종이 폄하되었음을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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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오다련
|어머니 = 연덕교
|친척 = 오부돈오부순<br />오다련<br />연위<br />오상<br />오환<br />오검
|출생일 = ?
|출생지 = 전라남도 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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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정치적으로 유씨 남궁씨 등이 연합하여 제2대 혜종을 제거하려고 결집하였고 혜종이 타게하게 되자 장화왕후와 그 소생 혜종을 폄하하려는 의도로 장화왕후를 비하하는 기록이 장화왕후의 사후에 덧붙여졌다. [[고려사]]에도 수록되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고려 태조|태조]](太祖)가 빨래터에서 만난 오씨를 불러 시침하였으나 오씨가 한미한 집안의 출신이므로 임신하기를 원치 않았다는 비하성식으로 전설이기록되어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장화왕후와 혜종을 비하하려는 것이었음을 학자들도 [[고려사]]바로인정하는 그것이다일이다. 일찌기 왕건에게 투항하고 그를 지지했던지지하여 왕건의 삼한지역 통일에 도움을 준 장화왕후의 집안은 후백제 견훤이 금성 지역에 쳐들어 온 후오자 보복을 당하여 세력이보유하던 약화되었고군사력이 그것을크게 기억한약화되었었다. 고려 건국 후 태조 왕건이 그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장화왕후의 부친을 안쓰럽게 여겨여겼다는 의미로 다련군(多憐君)으로 이라고 봉했던 것을 보면 오씨 가문이 본래 결코 한미한 집안은 아니었고 통일신라 말기의 호족 세력들의 합종연횡의 풍조하에서 왕건의 뒤를 이은 혜종을 제거하려고 담합한 연합세력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후 [[고려 혜종|혜종]]이 태어났는데, 왕이 태어난 마을이라 하여 왕을 상징하는 '용'자를 써서 이름을 '흥룡동'이라 하였다. 당시 처녀가 빨래하던 샘인 완사천이 지금도 나주 시청 앞쪽의 도로 옆에 있고, 그 옆에는 왕비의 비(碑)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