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버리 브런디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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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undesarchiv Bild 183-2004-0309-502, Berlin, Olympia-Vorbereitung.jpg|섬네일|베를린에서 (가운데가 브런디지)|왼쪽]]
'''에이버리 브런디지'''(Avery Brundage, [[1887년]] [[9월 28일]] ~ [[1975년]] [[5월 8일]])는 [[미국]]의 운동선수였고 스포츠 공무원, 미술품 수집가이며 [[박애주의자]]였으나 그는 현재까지도 미국 올림픽 위원회의 위원 때와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의 위원장이었을 때 했던 결정으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 생애 ==
[[디트로이트]] 출생으로 [[일리노이 대학교 어바나-샴페인]]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고 [[1909년]]에 졸업했다. 몇 년 후 그는 [[시카고]] 등지에서 토목공학과 관련된 일을 하는 에이버리 브런디지 사를 세웠으며 [[1947년]]까지 운영했는데 그의 개인사는 대학교에서 이룬 것과 관련돼있다관련되어 있다. 브런디지는 모든 스포츠에 다재다능하기도 해서 [[스톡홀름]]에서 열린 [[1912년 하계 올림픽]] 때 [[근대 5종]]과 [[10종 경기]]에 출전해서 각각 6위와 16위를 차지했다. 그는 또한 미국 체육 MVP상(US national all-around title)을 1914년, 1916년, 1918년에 받았다.
 
브런디지는 모든 스포츠에 다재다능하기도 해서 [[스톡홀름]]에서 열린 [[1912년 하계 올림픽]] 때 [[근대 5종]]과 [[10종 경기]]에 출전해서 각각 6위와 16위를 차지했다. 그는 또한 미국 체육 MVP상(US national all-around title)을 1914년, 1916년, 1918년에 받았다. [[파일:Bundesarchiv Bild 183-2004-0309-502, Berlin, Olympia-Vorbereitung.jpg|섬네일|베를린에서 (가운데가 브런디지)|왼쪽]]1928년 [[아마추어운동연합]](AAU)의 회장이 되고 다음해인 [[1929년]]에는 [[미국 올림픽 패럴림픽 위원회|미국 올림픽 위원회]](USOC)의 회장이 되었다. 또 [[1930년]]에는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의 부회장이 되었다. 1936년에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1936년 하계 올림픽|올림픽]]에서는 [[아슈케나짐|유대계 독일인]]이 배제되었기 때문에 이번 대회를 보이콧하자는 움직임이 일기도 했지만 USOC 회장이었던 브런디지는 그런 움직임을 전부 부정했다. 그리고 선수들에게 보이콧 행동을 부추겼던 [[어니스트 리 양키]]가 [[국제 올림픽 위원회]] 이사회에서 추방되었고 브런디지가 그 후임이 되었다. 브런디지는 후에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체제를 옹호하는 발언을 해 이것이 [[독일]]의 지지를 얻어서 미국우선위원회로부터 제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IOC 위원장이었던 [[앙리 드 바예라투르]]가 사망한 후, 브런디지는 IOC 부회장이 되었다. 이때 위원장은 [[시그프리드 에드스트룀]]이었지만 [[1952년]]이 은퇴한 후에 브런디지가 후임이 되었다. IOC 위원장 재임중에 어떤 형태로도 프로선수가 참가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이 태도는 차츰 스포츠계에서, 또 다른 IOC 위원도 반대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변화는 몇 번이고 논의를 한 것처럼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1972년 동계 올림픽]]에 참가한 [[오스트리아]]의 [[카를 슐란츠]]가 프로란 이유로 경기에 참석하지 못했다. 또 [[1968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토미 스미스]]와 [[존 칼로스]]가 시상식에서 블랙파워 행동을 찬성하는 의미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들어올린 사건도 있었다. 브런디지는 이에 대해서 두 선수를 선수촌에서 추방시키고 출장정지를 처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