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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화 ==
김구 비서 [[선우진]]의 증언으로는 경교장 생활은 전혀 풍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선우진은 정기적으로 얼마씩 수입이 들어오는 형편이 아니어서 재정적으로 어려웠으며, 돈과 관련된 일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던 탓에 자연 선생을김구를 모시는 이들의 생활도 여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한번은 1946년에 상공회의소 부회장 강익하가 300만 원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전달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그 돈을 받지 않고, 이승만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이승만에게는 이미 500만 원을 보냈고, 상공회의소 공의(公議)라고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김구는 [[이승만]]에게 전달하라고 했다.<ref name="s268"/><ref name="sum1">백범 김구 비서 선우진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푸른역사, 2008) 74쪽.</ref><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102017002 백범 수행비서의 절절한 추모와 회한] 서울신문 2009년 01월 02일자, 17면.</ref>
 
한미호텔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요인들의 형편이 어려워 점심을 굶는 일이 많게 되자, 주위에서 김구에게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던 [[이승만]]에게 돈을 부탁해 보라고 했다고 한다. 김구가 마지못해 돈을 부탁하러 [[돈암장]]을 찾았는데, 이 박사가 난색을 표해서 그냥 돌아왔다는 의견도 있다. [[조완구]] 선생과 [[엄항섭]]이 다시 김구에게 어려운 형편을 말하자 김구는 이 박사를 다시 찾아가 30만원을 얻어 한미호텔에 있던 요인들의 경비로 사용했다. [[선우진]]에행하여에 의하면 김구를 수행하여 [[돈암장]]을 방문했었는데방문했는데, 이승만은 “남들은 모두 내게 돈을 주는데, 백범은 내게서 돈을 가져가는구먼”하며 입을 실룩거렸다고 하며, 김구는 아무 표정 없이 돈암장을 나섰다고 한다.<ref name="s268"/><ref name="sum1"/>
 
한편 재정적으로 어렵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상해 시절에 대한 증언으로 [[안공근]]과 감정이 있었던 [[백찬기]]는 “김구파의 간부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나와 같이 병으로 쓰러진 사람에 대해서는 의료원으로 가라고 여비정도만여비 정도만 주어 쫓아버리는 식”이라며 비판하였다.<ref name="sum1"/><ref>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99~300쪽.</ref>
 
=== 백범일지 윤문 ===
김구의 저서 [[백범일지]]의 교열과 윤문은 [[이광수 (1892년)|이광수]]가 하였다.〈백범일지〉는 1928년, 1942년, 해방 이후 등 세 번에 걸쳐 기록되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윤문은 해방 이후 나온 책을 말한다.
 
[[1945년]] [[11월]] 김구가 자서전인 [[백범일지]]를 출간할 때 [[이광수 (1892년)|이광수]]가 윤문을 자청했다<ref name="han2">[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9780.html 통큰 인물 '벽초와 백범'] 한겨레 2005년 08월 25일자.</ref> 한다. 백범일지의 윤문을 허락한 사람이 백범 자신인지, 아니면 백범 비서 등 주변 사람이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ref name="kukki1">[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all&arcid=0920981005&cp=nv (책과 길) 출간 60년된 백범일지 감춰진 얼굴]{{깨진 링크|url=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all&arcid=0920981005&cp=nv }} 국민일보 쿠키뉴스 2008년 07월 25일자.</ref> 문제는 춘원이 윤문 과정에서 친필본에 없는 문장을 임의로 첨삭해 원전의 텍스트적 가치를 크게 훼손했다<ref name="kukki1"/> 는 의견이 있다.